13 사그라다파밀리아
시대 : 1882년부터 장소 : 스페인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
이것은 최후의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개념에 입각한 최초의 교회다.
― 안토니 가우디
그것은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내내 바르셀로나에서는 진보의 이름으로 교회들이 무너졌고, 종교적 건물에 대한 방화와 약탈, 파괴가 잇달았다. 하지만 바로 그 도시에서 19세기 말경에 옛 고딕 성당의 이념을 되살리고 현대 종교 건축물의 위대한 실례들 중 하나가 될 기념비적인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원대한 계획은 성 요셉을 숭배하는 작은 종교 단체에서 나왔다. 그 회장인 요셉 마리아 보카벨라는 성 가족, 예수, 마리아, 요셉을 모든 그리스도교 가족의 모델로서 받드는 교회를 건립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 교회는 속죄의 성격을 지니며, 오로지 자선과 기부로만 재정을 충당하기로 되어 있었다.
최초의 모금액은 옛 도시 중심 부근에서 토지를 구입하기에도 모자랐으므로 당시에는 바르셀로나 외곽이었던 엔산체가 선정되었다. 1859년에 토목기사 일데폰스 세르다의 도시 계획에 힘입어 도시는 급속히 팽창하고 있었다. 토지 구입 비용은 17만 페세타(약 700파운드)이고, 첫 삽을 뜬 시기는 공교롭게도 성 요셉의 축일인 1882년 3월 19일이었다.
공사는 건축가 프란시스코 빌라르 이 로사노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다. 원래의 신고딕식 설계는 이탈리아의 로레토 성당에서 직접 영향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1883년 말에 빌라르 대신 안토니 가우디가 책임을 맡으면서 계획은 전면적으로 재편되었다.
1878년에 건축가 면허를 취득한 가우디는 자신의 경력이 막 꽃피기 시작할 무렵에 사그라다파밀리아를 맡아 1926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계획에 긴밀히 관여했다. 1918년 이후부터 그는 오로지 사그라다파밀리아 건축에만 매달렸고, 집과 작업실도 그 건설 현장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교회는 가우디 건축의 정점에 해당하며, 그의 경력 전체에서 나온 모든 경험과 혁신이 집적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건축 양식과 종교적 심성
가우디의 건축은 아르누보의 맥락에서 탄생했지만, 강렬한 개성 때문에 그는 아르누보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부터 벗어났다. 가우디의 건축에는 현대의 다른 양식들을 예시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그가 자재를 사용하는 방식은 표현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유연성은 후대에 유기체주의 건축가들이 더욱 개발하게 되며, 그의 독특한 상상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과 잘 어울린다. 예컨대 건축가 프랭크 O. 게리는 가우디에게 적극 동조한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의 혁신적 발상과 구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사그라다파밀리아가 기본적으로 고딕 양식의 건물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우디는 평형을 중시하는 고딕 역학 원리를 채택하고, 그것을 중세의 어느 건축가보다도 더 철저하게 추구했다. 회중석의 교대는 안으로 기울어 그 자체로 버팀벽이 되는데, 이는 추력과 반추력 체계의 논리적인 연장이다. 가우디는 줄과 끈으로 실내의 개략적인 모델을 만든 뒤 그것에 석고를 입혀 거꾸로 매달았다. 석고를 뒤집으니 현재의 설계가 나왔다. 이러한 구조적 아치를 전문 용어로 현수(懸垂) 아치라고 한다.
가우디 건축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형상적인 발명의 능력이다. 아무렇게나 생긴 듯한 형상들이 실은 엄격한 논리적 추론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사그라다파밀리아의 건축은 입체기하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전체 건물은 고정된 비례 체계에 따라 조정되었다. 지배적인 형상에는 포물면과 쌍곡면이 포함되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만들어냈지만 오늘날에는 컴퓨터 보조 설계인 CAD를 이용한다.
또한 사그라다파밀리아에서는 가우디 건축의 또 다른 측면인 종교적 찬양의 짙은 감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그를 정통으로 여기지 않기도 하지만, 2000년에 가톨릭 교회는 가우디에게 시복(諡福, 성인 이전의 단계―옮긴이)을 내리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사그라다파밀리아는 교회가 현대 세계의 모순과 격변에 대해 승리한다는 표현으로서 설계되었으며, 이 때문에 가우디는 교회의 위치가 바르셀로나의 스카이라인에서 잘 보이는 곳이기를 원했다. 이러한 종교적 동기와 자연을 모방한 가우디의 건축적 구상을 아는 것은 그 건축물의 짙은 상징성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계획과 상징
교회는 산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계속 높이 치솟는다. 실제로 이 교회는 바르셀로나 인근에 있으며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몬세라트 산에 비유되기도 한다. 사그라다파밀리아의 맨 꼭대기에는 대형 큐폴라나 돔이 설치될 예정인데, 완성되면 전체 높이가 170미터나 된다. 또한 주위에는 아직 세워지지는 않았지만 130미터짜리 뾰족탑 네 개가 복음서의 네 저자를 나타낼 것이며, 높이 140미터로 교회의 앱스 위로 건설될 다섯 번째 뾰족탑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세 파사드의 꼭대기에 각각 네 개의 탑이 올려지면 수직 구조가 완성된다. 이 열두 개의 탑은 12사도를 뜻하는데, 높이는 100미터가 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여덟 개까지 완성되었다.
해가 뜨는 동쪽 파사드는 예수탄생을 의미하며, 해가 지는 서쪽 파사드는 예수수난을 나타낸다. 남쪽의 주요 파사드는 신의 영광에 바쳐진다. 교회의 실내는 숲을 닮도록 했으며, 나무처럼 보이는 기둥들이 떠받치는 둥근 천장에는 별 같은 형상들이 기하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우디는 1890년경에 마스터플랜을 제출했고, 1892년에는 예수탄생 파사드의 공사를 시작했다. 그가 직접 감독하여 완성된 것은 이것뿐이다. 사망할 무렵 그는 예수수난 파사드와 회중석의 상세한 계획을 완성했고, 교회 전체를 위한 상징과 도상에 관한 계획도 끝마쳤다. 주요한 전거로 1:10과 1:25의 축척으로 제작된 모형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1936년 스페인 내란 때 사그라다파밀리아가 약탈당하면서 파괴되었다가 나중에 복원되었다. 1936년부터 1952년까지는 건설 작업이 중단되었다. 공사가 재개되자 가급적 가우디의 계획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로운 기법과 콘크리트 같은 새로운 자재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사그라다파밀리아 건설에 반대하는 견해도 나왔으며, 계획의 타당성이 정기적으로 의문시되곤 했다. 그 의문은 종교적인 것도 있었고(현대 세계에서 기념비적인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학적인 것도 있었다(가우디의 극도로 개인적인 양식을 계승하는 게 올바른가? 새로운 예술적 언어를 포함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건설 작업은 크고 작은 여러 단계를 거치고 있다. 후원자들이 오로지 기부와 개인적 유증을 통해서만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1976년에는 예수수난 파사드와 네 개의 탑이 완성되었으며, 조각가 조셉 M. 수비라크스는 1986년부터 이 파사드의 조각을 맡아 일하고 있다. 2002년에는 회중석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부분은 완성되었다. 사그라다파밀리아가 언제 완공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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