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_내 남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남들 보기에 멀쩡한 남자 친구를 별로 사귀어보지 못한 것은 나의 오랜 콤플렉스다. 남자인 친구도 거의 없고, 연애는 실패만 거듭했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해선 안 될 방법으로 사랑한 까닭이었다. 나 역시, 남에게 사랑을 줄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아귀처럼 끝없이 받기만 원하는 사람을 어느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 좋지 못한 성정과 운이 따라주지 않은 환경과 중독적으로 소비한 알코올이 합쳐져 나는 누구도 탓할 수 없이 제 손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만들어왔다. 게다가 최근 1~2년간은 흉사가 겹쳤다. 폭력을 동반한 이별, 가장 사랑했던 친구의 끔찍한 사고사, 실직…. 이따위 일들이 숨 가쁘게 일어나면서 나는 원래도 별로 괜찮은 상태가 아닌 주제에 더욱 신속히 망가져갔다.
마음을 의탁할 만한 종교도 없었고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언제까지 하소연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에 깊이 베인 자상은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바닥에 질질 흘리고 다니는 그 피가 발바닥을 적시면 너무 미끄러워서 나는 자꾸만 넘어졌다. 피 묻은 발자국을 돌아보면 서 나는 생각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지인이 많지 않아 마음을 터놓은 몇 사람에게만 사정을 말했는데 오랫동안 꺼놓았던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라종일 선생님의 목소리는 내가 기꺼이 그 고통을 쏟아놓게 되는 몇 안 되는 음성이었다. 구차하고 기나긴 사정을 다 듣고 난 선생님은 세 가지를 이야기하셨다. 첫째,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둘째, 나는 네 편이다. 셋째, 글 쓰는 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불행해야 한다. 당신도 그것을 알지 않느냐?
…
살짝 궁금하지 않은가? 쭉 엘리트 코스를 거쳐온 탁월한 정치인, 행정가, 교육자이며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교가에 대학 총장까지 지낸 석좌교수와, 몇 권의 안 팔리는 책을 내고 삼십 대 초반인데도 여태껏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성격도 별로 좋지 않고 가끔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날백수, 겹치는 데라곤 전혀 없는 두 사람이 네 계절 동안 서른두 통이나 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_5~9쪽
꽃 지는 날 그대를 그리워하네
선생님께.
지난번 뵌 이후로 어쩐지 ‘꽃 지는 날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어디선가 읽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꽃이 져도, 꽃이 피어도 선생님께서는 특유의 안온한 표정을 잃지 않으실 것만 같아 그런가 봅니다. 세상만사 삼라만상이 무서운 일은 없고 모두 우스운 일뿐이라는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박혀서 그런 모양입니다.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세상에 무서운 일은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살아오면서 참되고 바르고 아름다운 기억은 그다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가 물어보면 나는 그냥 즐겁고 행복하다고만 말한다.” 선생님은 엷게 웃으며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냐고 물으셨죠. 그때 선생님의 미소가 깊은 바닷속을 담담히 흐르는 거대한 해류와 같아서 저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 나이 먹고도 인생이라는 바다의
얕은 물에서 발목이나 찰랑거리며 모래나 간질이고 있는 저로서는 결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심해의 물결 말입니다.
산다는 것의 엄중함이 무엇인지 생각하니 숙연해졌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한참을 되뇌어보았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일은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역사의 격변기를 직접 보셨고, ‘킹메이커’라 할 만큼 정치판에서도 큰 역할을 하셨고, 커다란 대학의 총장도 역임하셨지요. 그러면서 온갖 사람들이 머리 쓰며 제 이익을 좇는 광경을 무수히 보셨을 텐데, 어떻게 하면 제 이득을 위해 눈에 불을 켠 무서운 사람들을 우습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아주 사소한 불행 하나도 저는 사실 두렵습니다. 이것들을 우스운 일로 여길 수 있는 마음 자세는 과연 어떤 것에 있을까요. 저는 정말 알고 싶습니다. 아직 삼십 대 초반에 앞다투어 찾아온 반갑지 않은 일들, 이런 제 개인의 상처까지도 모두 우스운 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