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일본 게이오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비교 연구했고, 메이지대학 문학부 객원교수를 지냈다. 2008년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등 시집과, 삼국유사 원전을 우리말로 쉽게 옮긴 『삼국유사』, 삼국유사 관련 연구서 『일연을 묻는다』,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길 위의 삼국유사』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논어』,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 『그늘에 대하여』 등이 있다.
“살아라, 뜻을 드러내라!” 역사의 흐름에 맑은 물, 흐린 물 따로 없다. 역사의 음악에 높은 악기, 낮은 악기의 구별이 없다. 있는 것은 다만, 다만 오직 하나, “살아라! 뜻을 드러내라” 하는 절대 명령이 있을 뿐이다. _함석헌 --- 본문 중에서
최치원은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간다. 떠나는 아들에게 그의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 급제 소식을 전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매정하다. 어려서 침착하고 명민했으며 학문을 좋아했기에,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자랑과 기대가 남달랐다고 해도 말이다. 어쨌건 최치원은 그런 조기 유학생이었고, 아버지가 다짐시킨 10년조차 채우지 않고 두 해를 앞당겨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다. (중략) 스물여덟 살에 최치원은 돌아왔다. 그 사실을 『삼국사기』가 쓸 만도 했다. 그런데 9년이나 지난 『삼국사기』진성왕 8년 2월조에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이 나오더니 그것을 끝으로 그의 이름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김부식은 최치원의 생애를 적으면서,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유유자적 노닐며 자유로운 몸이 되어” 역사를 쓰고 노래를 읊으며 살다 갔다 했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훌쩍 세상을 버렸다고도 말한다. 성공한 조기 유학생이 그 정도였다. 물론 중국이건 신라이건 크게는 시절 탓이었다. 오늘 우리는 잘 키운 인재들을 적절히 쓸 수 있는 안정된 사회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조기 유학생들이 최치원처럼 우울하게 지낸다는 소식은 대체 어찌된 일일까? --- p.65, 「조기유학의 원조 최치원」 중에서
이언진은 본디 대대로 역관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인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용휴에게 가서 시를 배웠다. 스승은 그의 재주가 비범한 것을 일찍 알고 무척이나 아꼈다. 다만 이언진이 현실적으로 겪는 설움이 두 가지 있었다. 역관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당시로서는 야당이었던 남인 그룹의 스승을 모신 데서 오는 정치적 한계였다.(중략) 스무 살 때 과거 시험의 역과에 합격하여 사역원주부가 된 이언진은 스물네 살 때인 1763년, 바로 계미사행의 일행으로 일본에 갔다. 그의 진가는 여기서 발휘되었다. 가는 곳마다 일본인들은 이언진의 글씨 한 폭을 얻으려 밀려들었다. 18세기 ‘욘사마’의 탄생이었다. 불과 3년 후 스물일곱의 나이로 생애를 마친 천재의 한때나마 행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