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 없는 세월은 더 더디 흐르겠지. 빨리빨리 늙었으면 좋겠어. 빨리 늙어서...내 꿈은 그저...그냥, 가만히 앉아서 해바라기하는 거야. 그 옛날 당신 집을 지날 때면, 나는 언젠가 내가 거기서 그렇게 한세월 보낸 것만 같아서, 그 할머니 곁을 지나 불쑥 그 집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지. 그처럼 나는 그냥, 차 소리가 멀리 들리는 한가한 공원, 볕 바른 곳에 가만히 앉아 먼데 눈을 주고 깜박깜박 조는 거야. 잠깐 눈을 뜨면 나무 그림자는 저만큼 옮겨가 있고, 또다시 자울자울 졸다가 모이 쪼던 비둘기떼 후르륵 날아가는 소리에 반짝 깨어나기도 하고. 그렇게 후딱후딱 시간을 건너뛰었으면. 끌탕하던 마음도 저며들던 아픔도 그때쯤엔 사위어 고운 재로 날리는데, 나는 그 희부연 속에 앉아. 당신 태워간 그 배 언제 오려는지 먼데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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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네. 겨우네 얼었다 녹았다 하던 땅이 마르더니, 오늘은 흙먼지 날리는 바람도 스산하고, 이제 당신, 당신 같은 혼백들이 슬몃슬몃 없는 몸 일으킬 시간 아니야? 어스름녘이면 이상하게 희뜩희뜩 눈앞을 스치는 듯하던 그것들, 알고 보면 당신 같은 혼령들이었나. 왜 그런다잖어. 귀신은 어스름 깔릴 때 내려와서 새벽닭 우는 소리에 쫓겨간다며? 그럼 낮 동안엔 어디 있는 걸까. 해뜬 날 뒤따르던 그림자 속에 머무르는 걸까? 당신 어디 있다가 오는 거야? 당신이 여기에 와 있기나 한 건지 딴 데서 노니는지, 누가 알겠어. 이젠 미끄러질 리도 없으니 너울너울 날아서 가던 길 마저 가고 있는지 모르지. 당신, 도대체 왜 나한테 온 거였어?
말이 났으니 말인데, 당신하고 결혼하던 날, 나 운 거 모르지?
그때도 당신, 폼은 어지간히 잡았어. 냉수 한그릇 떠놓고 올리는 식인데도 육탈한 지 오래됐을 당신 어머니 아버지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불러대며 결혼한다고 고했으니까. 그게 있이 살던 사람 법인지는 몰라도 난 좀 우스웠지. 그런데도 당신이 소반 앞에서 뭐 대단한 사당에서나 고하는 것처럼 "이제 이 사람, 풍양 조씨 조성자를 우리 가문의 며느리로 맞아……"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문득 북받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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