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대중문화 매체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내가 가장 좋아했던 댓글은 “ㅋㅋㅋㅋㅋㅋㅋ”였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지 항상 궁금해했고,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코드들을 관찰해 그들을 웃길 수 있을 것 같은 글을 썼다.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또한 나는 멋진 남자들의 세계에 빠져들고,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다양한’ 매력을 발굴해 전파하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 물론 가끔은 멋진 여자들에 대해서도 썼다. 하지만 분명 남자들보다는 적었다. 나는 모든 영역에서 남성들에게 더 관대했고, 너무 금세 숭배했다.
(중략)
페미니즘이라는 깊고 넓고 무거운 화두를 감히 내가 다루어도 될지 수없이 망설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부족함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대중문화 콘텐츠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은 그 전처럼 즐겁지 않고 낯설어졌다. 나는 종종 주위 사람들에게 “그거 봤어? 혹시 나만 불편한 거야?”라고 묻고 확인해야만 했다. 계속 혼란스러워하다가 ‘나도 불편하다’는 누군가의 글 한 줄을 발견하고서야 겨우 안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말하고 싶었다.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나도 그렇다고, 우리 같이 얘기해 보자고.
--- p.5~7
여학생의 복장과 행동을 단속하는 것이 과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일까. 몇 년 전, 유명 시인이자 교사인 남성이 학교에서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해임되었다. 낯설지 않은 사건이었다. 학창 시절 진로 상담을 받고 나온 친구들이 “긴 소파에 자리가 많은데 선생님이 끝자리에 꼭 붙어 앉으려고 했다”, “선생님이 계속 손을 주물러서 기분이 나빴다” 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너무 흔한 일이어서,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누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우리는 뒤에서 수군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남교사의 여학생 대상 성범죄는 여전히 너무 흔한 일이다. 2017년 4월, 경기 화성동부경찰서는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한 교사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는 교무실에서 자기 반 학생 3명과 개별 상담을 하며 “너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 내가 네 마음을 뺏고 싶다”, “데이트를 하면서 얘기하자”는 등의 말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2 2017년 8월, 여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전교 여학생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55명의 엉덩이 등을 만진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그와 함께 구속 기소된 또 다른 교사는 여학생 31명을 성추행하고 남학생 3명을 폭행한 혐의를 받았는데, 그는 해당 학교에서 인권 담당 생활부장을 맡고 있었다.3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과정에서도 한 예술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남성 강사의 성추행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단속해야 하는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
--- p.14~16
분명 존재하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감정 노동은 엄마의 일상을 속속들이 지배한다. 아이에 대한 애정과 육아로 인한 피로는 모순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노동의 강도는 더 높아지기도 한다. 양육은 단지 아이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데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전담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고되고 복잡한 노동이다. 육아를 ‘선택적’으로 할 수 있는 아빠들과 달리 육아를 도맡다시피 하는 많은 여성은 다른 여성들에게 출산을 쉽게 권장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며 후회하기도 한다.
2017년 3월 금융연구원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이 추세대로는 2060년 출생아 수가 역대 최저를 또 갱신한 지난 2016년의 절반 수준인 20만 명까지 떨어질 거라고 한다. 한 인간의 삶이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십수년까지 다른 인간의 삶에 바쳐지는 방식으로 돌아가던 시스템은,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그토록 혹독한 ‘엄마되기’의 무게를 거부하면서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엄마는 위대하다’는 무용한 찬사가 아니라 엄마도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들에게만 떠맡겨 놓았던 짐을 줄이거나 나누어서 지는 것이다. 자신이 지워지고 지친 여성들이 불꽃은커녕 재가 되어 스러져버리기 전에.
--- p.63~64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한국 예능, 특히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그에 대한 기사, 댓글, 온라인 커뮤니티의 반응을 보며 가장 마음이 복잡해졌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체중 관리부터 표정, 몸짓, 발언, 행동, 심지어 범죄 경력까지, 왜 우리는 이토록 남자에게 관대하고 여자에게 엄격한가. 여자 연예인이 무례한 일을 겪었을 때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남자 연예인의 무례한 언행은 왜 그렇게 조용히 빠르게 잊어주는가. 열애설에도 크게 휘청하는 여자 연예인들과 달리 도박, 음주운전, 폭행 따위를 저질렀던 남자 연예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복귀하는가. 왜 남자는 50이 가깝도록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살아도 귀엽게 연출하고 재미있게 봐주면서, 여자에게는 스물만 넘어도 자기 관리는 물론 인간관계와 가사 노동에서도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센스’를 일괄적으로 당연하게 요구하는가. 도대체 그 ‘센스’란 무엇인가?
--- p.136~137
남자끼리 모든 것을 다 하고 여자들은 들러리만 세우거나 아예 존재를 지워버린 이야기가 한국 영화 시장을 먹어치우면서 여성 배우들의 입지가 급속도로 좁아지고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혐오 역시 심각한 수준에 이른 뒤에야 깨닫고 말았다. 나는 바로 그 ‘알탕 영화’ 전성시대를 만드는 데 일조한 관객이고 기자였음을. 그래서 이 다년간의 관람 경험을 토대로 다음 ‘알탕 영화’의 법칙을 정리했다. 아직도 ‘상남자 취향 저격’ 영화를 만들고 싶은 제작자들은 참고하시라. 아니, 고만해라. 마이 묵었다.
주요 인물 두 명 이상의 직업군이 형사, 검사, 조폭인가?
범죄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물리력이나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쉽게 갈등 구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면에서 형사, 검사, 조폭은 이 장르 3대 직업군이다. 〈신세계〉의 이자성은 상사 강과장(최민식 분)의 명으로 깡패 정청과 가까워지면서 경찰과 폭력 조직 간부라는 2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아수라〉의 형사 한도경(정우성 분)은 조폭과 손잡은 시장 박성배(황정민 분)를 위해 일하던 중 그를 치려는 검사 김차인(곽도원 분)의 협박을 받고 딜레마에 빠진다. 어딘가 비슷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겠지만 두 작품은 모두 ‘사나이 픽처스’에서 제작했다. 〈내부자들〉에서 조폭 안상구(이병헌 분)와 의기투합하는 우장훈(조승우 분)은 경찰 출신 검사로 혼자 1인 2직업을 섭렵했다. 그러나 물론 이 분야 최강자는 황정민으로 조폭(〈달콤한 인생〉 등), 형사(〈베테랑〉 등), 검사(〈검사외전〉)를 두루 거치며 트리플 크라운을 획득했다.
--- p.181~182
나의 기억은 다른 여성들의 기억으로 이어지고 나의 경험 또한 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연결된다. 언젠가부터 나는 집에 혼자 있을 때는 택배를 받지 않는다. 온라인에 내 동선과 주거지를 노출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 밖에도 나만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내 안전을 도모한다. 하지만 어떤 것도 나를 완벽히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혼자서 ‘조심’한다 해도 모든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시, 왁싱숍에서 살해당한 여성에 대해 생각한다. 피해자를 아프리카 TV에 출연시킨 BJ는 방송을 통해 여성 왁서를 성적 대상화했다. 제모 기술자인 여성은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지만 그 자체로 남성들에게 성적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취급받았고, 이를 시청한 남성들 중 한 사람이 그를 범행 대상으로 삼아 살해했다. 이 황망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성이 위험 속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혐오적 콘텐츠는 어떻게 실질적으로 여성을 위협하는가. 심지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웹툰 사이트에서는 왁싱숍을 퇴폐 업소처럼 묘사하고 여성 왁서가 유사 성행위 서비스를 제공하는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싸우기로 했다. 여성혐오 발언을 했던 코미디언에게 프로모션 광고를 맡긴 기업에 항의와 구독 해지 의사를 표하고, 여성 대상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에게 후원하며, 국민신문고의 문을 끈질기게 두드리고,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 p.235~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