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런 것이 번쩍번쩍, 반짝반짝거리며 어딘가에 손도 대지 않은 상태로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기운을 감지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만은 안다. 이 거리에는 없고 길 가는 사람의 눈에도 없다. TV 속에도 백화점 안에도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 p.145
하지만 지금은 휴식할 때가 왔고, 많은 일들이 오래 끌기도 했고 피곤해서 이제 졸리다. 오늘 하루가 끝난다. 다음에 눈뜨면 아침 해가 눈부시게 비치며 또 새로운 자신이 시작된다.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본 적도 없는 하루가 샹겨난다. 어릴 때 시험이 끝난 방과후나, 특별 활동 대회가 있었던 날 밤에는 언제나 이런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바람 같은 것이 채내를 떠돌아다니고 틀림없이 내일 아침에는 어제까지의 일이 전부 말끔히 제거되어 있을 게다.
--- p. 90
집 안은 아쓰코의 우주다. 여자는 자기의 작은 분신인 잡다한 물건으로 집을 가득 채운다. 그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바로 그 샴푸처럼 진지하게 선택되고,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 어떤 얼굴을 하게 된다.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둘러친 아름다운 거미줄은 소름끼칠 정도로더로운 것이기도 하고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깨끗한 것이기도 하다. 부들부들 떨 정도로 두렵고 아무것도 감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타고난 마력에 농락당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요컨데 신혼이란 것이군.'
--- pp. 19-20
세상은 내가 이것저것 생각을 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나도 이 사람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있어서,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더라도 그냥 점점 흘러서는 올바른 위치로 흘러들어가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
'또 만나줘요' 라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만지고 싶어서, 미칠 정도로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그녀의 손을 만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지요, 신니여.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손을 잡았다.
--- p.34
내 사랑은 네 사랑과 조금 달라.
예를 들면 네가 눈을 감았을 때 바로그 순간에 우주의 중심이 너에게 집중하지. 그러면 네 모습은 한없이 작아지고 뒤에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이 보이기시작하지. 너를 중심으로 해서, 그것은 엄청난 가속으로 점점 퍼져가지. 내 과거의 모든 것.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 내가 쓴 모든 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모든 경치, 별자리, 아련히 푸른 지구가 보이는 암흑의 우주공간까지.
대단해 대단해 하고 나는 내심 미칠듯이 기뻐하고, 그리고 네가 눈을뜬 순간 그것은 전부 사라져버리지. 다시 한번 생각해주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하지.
둘의 생각은 이처럼 전혀 다르지만 우리는택의 남녀야. 아담과 이브의 연정의 모델이지. 사랑하는 사이인 남년 중의 모든 여자에게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여러가지 버릇이, 모든 남자에게는 응시의 순간이 있어. 상대방을 서로 따라하며 영원히 이어지는 나선이지. DNA처럼. 이 대우주처럼.
--- pp.67-68
나는 틀림없이 그 어떤 것에서도 너에 관한 것을 발견해서 반드시 기억해 낼 거야....함께 많은 걸 보았고 많은 걸 먹었잖아. 그러니 이 세상의 그 어떤 풍경에도 네 자취가 담겨 있을 거야. 우연히 지나친 갓 태어난 아기. 복어회 밑으로 비치는 접시의 선명한 무늬. 여름 하늘의 불꽃놀이. 저녁 무렵 바다에서 달이 구름에 가려질 때. 테이블 밑에서 누군가와 발이 부딪혀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누군가 친절하게 물건을 주워주어서 고맙다고 말할 때. 곧 죽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비틀비틀 걸어가는 것을 볼 때. 길거리의 개나 고양이. 높은 곳에서 본 경치.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서 미적지근한 바람을 얼굴에 느낄 때. 한밤중에 전화가 울릴 때. 다른 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 그 사람의 눈썹 선에서도 반드시.
--- p. 65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든 부자연스럽든 상관없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이 났다. 사실은 그랬다. 그럭저럭 서로 마음이 있는 두사람이 있어 별 생각없이 약속을 하고 밤이 되어 먹고 마시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오늘쯤 해도 된다고 서로가 암묵의 타협을 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만지고 싶어서, 키스를 하고 싶고 껴안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일방적으로든 아니든 눈물이 날 정도로 하고 싶어서, 지금 곧, 그 사람하고만, 그 사람이 아니면 싫다, 바로 그런 것이 사랑이었다. 생각이 났다.
---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