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 책의 제목 ‘캔들 플라워’는 무슨 뜻인가요?
A. 초꽃. 캔들(candle)과 플라워(flower)의 합성어입니다. 촛불이 꽃 같다는 의미, 촛불 하나하나가 한 송이씩의 꽃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 말입니다. 한국을 방문한 이 소설의 주인공 지오가 촛불 광장에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캔들 플라워! 꽃 피기 직전에 체온이 올라가는 꽃들처럼 촛불을 든 사람들이 따뜻했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따뜻한 우정으로 서로 손을 잡는 순간, 우리 모두가 ‘캔들 플라워’인 거지요. 촛불은 화려하게 밝지는 않지만 자기 자신의 밑자리를 밝히고 아주 소박하게 자신의 옆자리를 밝히니까요.
Q. 첫 소설에서도 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그리시는 등 남다른 소재를 고르셨는데, 이번에 ‘촛불’을 소재로 소설을 쓰시게 된 계기는?
A. 2008년 촛불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경험이었지요.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건이었지만, 정작 우리는 어느 틈엔가 너무나 빨리 ‘한 여름 밤의 꿈’ 쯤으로 그 사건을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었어요. 아름다운 경험은 기억하고 기록해야하지요. 어제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오늘의 아름다움이 성장할 수 있도록 말이죠. 개인적으로 문학이란, 어떤 슬픔과 비루함 속에서도 끝내 존재해야 할 ‘아름다움에의 의지’라고 종종 저는 느낍니다. 우리 삶에 정말로 소중한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데 문학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Q. 소설 속 인물 중 ‘지오’는 현실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캐릭터인데, 모델이 있었는지요? 어떻게 구상하셨는지요?
A. 지오는 제가 꿈꾸는 인물, 일종의 이상형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존재죠. 지오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산과 바다 계곡을 뛰놀고 마을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세상공부를 하지요. 대한민국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언어에 대한 절대적 동경으로 영어몰입 ‘질병’을 앓고 있지만, 지오는 전 세계 다양한 언어들을 골고루 궁금해 하고 동식물의 언어도 궁금해 하는 소녀지요. 지오가 살고 있는 공동체 마을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자연과 유리되지 않은 조화로운 삶의 방식이 지오를 다양성의 가치를 아는 존재, 천연의 감각을 가진 자연의 아이로 키운 것인데요. 지오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생 가능성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다보니 지오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청소년 시기를 입시지옥 속에서 시들어가야 하는 지금의 우리 현실에선 불가능한 캐릭터지만, 우리가 우리의 이런 현실을 개선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한,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수도 있는 캐릭터지요. ‘조화로운 삶’의 가치를 탐색해 온 부모세대를 지나면서 그런 아이들의 출현이 조금씩 예고되고 있는 것처럼, 지오는 포기할 수 없는 미래 가치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제가 꿈꾸는 미래형 소녀지요.
Q.『캔들 플라워』에 등장하는 또 다른 개성만점 인물들은 어떤 캐릭터인가요?
A. 글쎄요. 독자들의 개성에 따라 모두 다르게 느낄 것 같은데요. 사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이 소설을 구상할 때, 일반적인 소설 서사의 기승전결 구도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발단에서 절정, 결말에 이르는 정통서사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 외 인물들을 부차적 존재로 만드는 경향이 있지요. 저는 이 소설 속에서 주요인물과 부차 인물이 구분되지 않길 바랐고요. 등장인물 모두가 저마다의 중심인 다양한 구심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 인물에게 과도하게 몰입되는 이야기 구조를 일부러 피해갔습니다. 그것이 제가 파악하는 2008년 촛불의 근원적인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촛불은 하나의 중심을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기보다,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중심을 만들면서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낸 아주 컬러풀한 시위였지요. 그것이 촛불의 가장 큰 매혹이기도 했고요. 촛불 시위가 창조한 새로운 미학성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소녀소년들을 좋아합니다. 십대, 이십대 친구들을 보면 가슴이 뛰어요. 그이들이 우리의 미래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십대, 이십대들에게 너무나 가혹하지요. 이 반짝이는 청춘들이 시험과 사회의 온갖 제도적 관습이 만든 사다리 타기로 내몰리는 것을 보면 너무나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부심으로 산다!”고 외치는 태연이의 독립생활이 어여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민기의 방황이 가슴 아프고, 버려진 강아지를 보살피며 친해진 희영과 연우의 따뜻하고 여린 마음과 우정이, 큰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씩씩하게 그것을 극복하는 상큼 발랄한 욕쟁이 강남 아가씨 수욾에게도 애정이 갑니다. 소녀 소년 같은 숙자 할머니와 홍씨 할아버지에게도요.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꿈은 잃어버린 이지훈 기자도 마음 아픈 캐릭터이지요.
Q. 이 소설을 읽는 젊은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A.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기보다 함께 고민하며 수다 떨고 싶었던 소설입니다. 난 이런 꿈이 있는데, 넌 어때? 하고 물어보고 서로의 말을 들으면서 말이죠. 굳이 메시지를 말하자면, “꿈의 자가발전!” 한국사회가 너무 못나서 우리에게 맘껏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꿈의 자가발전소를 세워야 한다는 것!
산다는 건 꿈꾼다는 거죠. 여전히 무언가 소망하고 꿈꿀 게 있다는 거. 현실이 어렵다면 더 왕성하게 꿈꾸어야 합니다. 꿈꾸지 않고는 더 나은 미래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으니까요. 우리가 이전에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싱싱하고 발칙한 꿈들, 아무도 걸어가 보지 않았던 맨 처음인 꿈들을 우리 젊은이들이 왕성하게 소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에선 이런 표현을 썼어요. “발꿈치를 살짝 들고 땅과 공기의 중간쯤을 걷는 듯한. 현실에 있되 현실 조금 위쪽을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 이런 걸음걸이로 우리가 함께 걸어간다면 세상이 조금씩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요.
Q. 김선우 작가님을 시나 수필로 접한 독자들은 많지만, 소설가로서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데요, 소설을 쓰시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
A. 일단 저에게는 시, 산문, 소설 같은 장르의 차이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건 오직 ‘글’로 수렴되지요. 어느 시기에 어떤 종류의 글에 몰두하는가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전 생애를 통해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구요. 가능한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5년쯤 전에, 일제 식민지 시대에 전 세계에서 무용공연을 하며 조선을 세계에 알린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었어요. 그때 시나리오를 쓰면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아주 커지더군요. 시나리오가 영화화를 전제로 한 작업이라 시공간 배치의 제약이 많기 때문에 무제한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소설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 같아요. 그렇게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하자 제 속에 소설로 쓰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
Q.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쓰실 계획이신지?
A. 물론! 첫 번째 소설 『나는 춤이다』를 쓸 때, 소설을 쓰는 중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 소설을 끝내고 나면 바로 그 다음 소설을 쓰고 싶다” 라고요. 창작이라는 게 꿈처럼, 쓰면 쓸수록 자가발전 되는 면이 있거든요. 창작하는 중간에 이미 다음 창작하고 싶은 게 내 몸에 어떤 색깔로 스며들어 이미 자라기 시작하는 거예요. 구체적인 서사가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어떤 윤곽과 색깔 같은 거로 말예요. 이번 소설을 쓰면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번엔 좀 더 구체적인 서사와 색깔이 몸에 스몄어요. 『캔들 플라워』가 세상의 독자들과 잘 만날 수 있도록 기본적인 노력을 한 후엔 곧바로 다음 작업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Q. 시를 쓰는 작업과 소설을 쓰는 작업은 어떻게 다를까요?
A. 시와 소설 작업은 굉장히 다릅니다. 굉장히 달라서 매력이 있기도 하구요. 극과 극의 두 가지 몸을 사는 일이 저로선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저는 본질적으로 기질 자체가 시인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소설 쓰기의 매력도 시 쓰기에 못지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만으로 부족함을 느끼는 어떤 지점(주로 ‘사회 역사적 관계성’의 문제, ‘공동체적 이상과 개인 간의 관계 탐구의 문제’ 등)을 소설로 부딪혀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시는 시인의 삶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내적 장르인데, 소설은 이 점에서 매우 다르고 글쟁이로서의 도전의식을 자극합니다. 두 장르의 차이를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한두 시간은 떠들어야 할 것 같고요.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는 술에 취해서도 쓸 수 있지만 소설은 술에 취해서는 절대 쓸 수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