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비통한 슬픔이라니! 슬픔이 온통 새롭고 생소하고, 아직 희망의 날개를 타고 현재를 벗어나 미래로 날 줄을 모르는, 그리고 한해 여름에서 다음해 여름까지의 시간이 영원처럼 긴 어린시절에, 슬픔은 얼마나 쓰라린가!'
『The Mill on the Floss 플로스 강가의 물방앗간』에서,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던 오빠가, 돌봐주라고 했던 토끼들을 죽게 했다고 혼을 내고 혼자 놀러 나가서 버림받은 매기가 혼자 다락방에서 흐느낄 때 작가가 한 말이다.
죠지.엘리엇 George Eliot의 여러 편의 장편소설 중에서 어린이용으로 각색할 수 있는 소설은 아마도 『The Mill on the Floss 』와 Silas Marner정도가 아닐까 한다. 엘리엇의 다른 소설들은 등장인물도 많고 플롯도 복잡하고, 시대적인 상황이나 인습에 대한 이해가 작품을 소화하는데 필수적이어서 어린이용으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나 플롯이 비교적 단선적인 The Mill on the Floss는 주인공 매기의 유년시절의 귀엽고 애처로운 모습이 독자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필자에게는 어렸을 때 읽은 감동의 여진이 오래 남았고, 20대, 30대, 40대에 다시 읽으면서 그 속에 담긴 깊은 생의 진실을 더욱 음미하게 된 명작이다.
계집애들이 영리하면 곤란하지요. 말썽꺼리만 되니까. 딸이 책을 술술 읽고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손님들 앞에서 유창하게 재현하는 것을 대견스러워하던 아버지는, 쑥스러워하면서 자랑을 감춘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딸이 더 머리가 좋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지만, 책이라면 원수같이 싫어하고 낚시나 새를 잡으러 다니는 것만 좋아하는 아들 톰은 학교에 보내고, 지적인 호기심이 왕성한 매기에게는 오빠의 기숙학교를 2주일간 방문할 수 있는 특전이 고작이다. 오빠의 학교에서, 어깨너머로 공부하는 데 신이 난 매기는 오빠가 유크리드 기하학 때문에 쩔쩔매는 것을 보고 자기가 배워서 오빠를 도와주겠다고 한다. 오빠는 계집애가 어떻게 유크리드를 하니?하면서 선생님에게 여자애들도 유크리드를 배울 수 있나요?하고 묻고, 선생님은 여자들도 무엇이든 조금씩은 배울 수 있지. 여자 애들은 얄팍한 재주는 많으니까. 그러나 어떤 일이든 깊이 들어갈 수는 없어라고 대답한다.
매기는 어린 시절부터 지적인 욕구와 애정에 대한 갈망이 남다르지만, 보수적인 부모를 둔 19세기 초 영국의 시골 물방앗간 집의 딸이 자신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게다가 아버지가 소송에 패해서 집안이 파산하게 되어, 매기는 황량한 집안에서 침울하고 말 수 없는 아버지와 오로지 돈을 벌어서 아버지의 빚을 갚고 떳떳하게 성공을 해 보겠다는 일념밖에 없는 오빠의 그늘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한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오로지 자기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포기함으로써 내적인 평화를 얻으려하지만, 그녀의 애정에 대한,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허기는 갇힌 짐승처럼 그녀의 내부에 잠복한다.
오빠 톰의 학교에서 만났던, 아버지가 원수로 여기는 변호사 웨이켐의 아들 필립을 산책길에서 만나 그와 책과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잠시의 지적인 충족을 느끼지만 그 사실을 알아 낸 톰은 아버지에게 이르겠다고 위협하면서 매기에게 필립과 다시 안 만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토록 삭막한 환경에서도 매기는 큰 키의 기품있는 미녀로 성장하고, 그녀의 가장 다정하고 살가운 벗인 사촌 동생 루시의 약혼자 스티븐.게스트를 만나게 된다. 대 실업가의 아들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스티븐은 자신의 가난함을 당당히 공표하는 매기에게 매혹되고, 고단하고 피폐한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동경하던 매기는 자기를 사모하고 경배하는 건장하고 세련된 남성에게 주체할 수 없이 끌리게 된다.
사촌동생의 약혼자로 인해 매기가 겪는 내적인 갈등과, 그녀의 뼈아픈 윤리적 결단을 곡해하는 세상의 편견과 박해, 그리고 오빠와의 불화는 그녀를 사면초가의 절망적 상황으로 몰고 간다. 그 때 발생한 플로스 강의 홍수는 재앙이었을까, 아니면 구원이었을까?
전반부에는 다분히 동화적 분위기가 넘치는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플롯의 이 소설에서 작가 죠지.엘리엇은 19세기의 인습이 지배하는 영국에서 뛰어난 지적 욕구와 감수성을 지닌 예외적인 여성은 사회와 부딪치고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사람을 인습의 잣대로 평가하고 비난하기 전에 인간의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의 아픔을 헤아릴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배경에는 영국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의 여러 면모가 담겨있다.
일찍이 영국의 농촌에서 신앙심 깊은 목수의 딸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당대 최고 지성인의 한사람이 되었고, 급진사상가들의 기관지인 Westminster Review의 편집장이 되었던 예외적인 여성 죠지.엘리엇 (본명 매리.앤.에반스)은 남편의 권유로 37세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의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같이 생물학, 지질학의 발견과 고증학적인 성서분석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버리고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되었지만,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기독교적인 윤리관은 그녀로 하여금 소설을 통해 인간은 모두 서로의 운명에 연대적 책임이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인간의 내면을 조명함으로써 인간 상호의 이해와 통찰력을 증진시키려는 사명감을 갖게 했다. 엘리엇은 또한 모든 영국작가 중에서, 최상류층 귀족에서부터 품팔이 노동자에 이르는 전 계층과 직종의 사람들의 유형과 가치관과 습성을 가장 잘 알고, 그들의 삶과 의식을 그들 특유의 언어와 함께 생생히 재현해 낸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에서도, 너무도 풍부한 감정 때문에 자주 상식선을 넘는 매기, 역경 앞에서 꿋꿋하지만 편협하고 독선적인 톰, 신체적 불구 때문에 극도로 섬세하고 예민한 예술가 필립 등 주요인물들이 오래오래 기억되고, 옛 생활방식과 질서를 대표하는 매기의 외갓집 사람들의 좁은 궤도에 충실한 삶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고, 마음은 너그러우나 무식하고 아집이 센 털리버씨, 영악한 행상이지만 어떤 인도주의자보다 풍부한 인간미의 소유자 봅.제이킨 등 수많은 생생한 인물들이 이 소설에 흥미를 더하면서 한 사회, 한 시대의 삶에 동참해 본 충만감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