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을 나오자마자 진후가 향한 곳은 호텔 상층부의 스위트룸이었다. 시야는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쥔 채 발걸음을 옮겼고, 룸의 문을 잠근 후에야 그녀를 풀어주었다.
“무슨 짓이야, 유진후! 당장 문 열어!”
“한계에 다다른 티가 나는군. 왜 감추고 있었던 거야. 아예 온몸의 피가 정지해 버린 후에야 내게 말할 참이었어?”
“당연한 거 아니야? 죽어도 당신 피는 먹지 않아…… 절대로!”
진후는 눈에 띄게 창백해진 시야의 얼굴을 보며 입매를 굳혔다. 왜 진즉 눈치 채지 못했단 말인가. 이 정도라면 적어도 어제부터는 몸속의 장기에서 피가 마르고 있었을 텐데……! 필경 그녀는 온몸의 피가 고갈되어 심장이 멎어 버릴 즈음에나 제 상태를 말할 작정이었으리라.
인위적으로 혈귀의 생명을 부여받은 인혈귀의 단점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보름에 한 번씩 창조주의 피를 공급받지 않으면 온몸이 서서히 굳어진 채 죽어 버린다는 것. 그는 거칠게 정장 상의를 벗어던졌다.
어느 틈에 시야는 문 쪽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진후는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낚아채어 침대 위에 밀어 버렸다. 침대가 가볍게 출렁이면서 삽시간에 그의 몸이 시야를 짓눌렀다.
“아아악!”
빈틈없이 전신을 압박한 그의 무게도 상당했지만, 그녀가 비명을 내지른 이유는 반쯤 뒤틀린 손목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손목을 바짝 조여드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시야는 고통스레 신음했다.
“이것 놔…… 아파, 아프단 말이야 유진후!”
“내가 세상 무엇보다도 이기적이라고 말한 건 바로 너였어, 시야.”
그러니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가 나로 인해 괴로워하든 말든 개의치 않을 거다.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시야를 짓누른 진후는 그의 팔목을 손끝으로 그었다. 한순간, 찌릿한 통증과 함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핏방울은 정확히 그녀의 입술 위에 떨어졌고, 시야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조차 어찌할 수 없는 본능, 그리고 갈망. 당장이라도 입술을 핥으며 피를 맛보고 싶었지만, 몸의 본능보다는 이성이 더 강했다. 더는 괴물 따위로 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질끈 눈감으며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진후는 시야의 얼굴을 붙잡은 채 피가 흐르는 팔을 들이밀었다.
“당장 마셔. 더는 저항하지 말고 네 자신에게 굴복해. 너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넌 이미 인간이 아니야. 나와 같은 혈귀일 뿐이지.”
“아니야! 난 괴물 따위가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어느새 시야의 음성은 울음 섞인 헐떡임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탁하게 흐려진 눈빛으로 진후를 올려다보았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 때문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죽도록 목이 말랐고, 전신을 압박해오는 충동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진후의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
한순간, 시야는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듯,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예리하게 훑고 지나가는 쾌감. 그녀는 홀린 듯이 그의 피를 삼켰다. 텅 비어 버린 마음마저 채워지는 듯한 느낌에 더는 멈출 수가 없었다. 먼 훗날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지금만큼은 이 격렬한 충동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시야가 이성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멍한 얼굴로 진후의 품에 안겨 있던 것도 잠시, 그녀는 이를 악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연회장에 있을 때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어지러웠건만, 지금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짙은 혈색이 피어오르는 손을 내려다보던 시야는 진후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렇게나 내던졌던 재킷을 주워들던 참이었다. 그녀의 속내는 활화산처럼 폭발할 지경이건만, 저 남자는 저렇듯 태연한 모습이라니.
그녀는 홧김에 침대 옆에 놓인 꽃병을 잡아채어 내던졌다. 그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가볍게 몸을 비틀었고, 크리스털 꽃병은 속절없이 벽에 부딪쳐 버렸다.
와장창!
반사 신경만으로도 인간의 몇 배를 넘어서는 그가 순순히 맞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분노를 더욱 부풀린 것은 진후의 반응이었다.
차라리 그가 그녀에게 화를 냈더라면, 조금이라도 눈매를 굳히며 소리쳤더라면 그녀 또한 편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깨진 크리스털 조각들을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이…… 미치도록 답답하고 끔찍했다.
“뜻대로 되어서 속이 시원하겠어, 유진후. 적어도 보름 동안은 더 날 살려둘 수 있으니……. 이젠 만족해?”
“물론.”
“하긴, 왜 안 그렇겠어. 곁에 달고 다닐 장식품에, 침대에서 안고 잘 인형에, 유사시에는 수혈 팩으로도 써풸을 수 있는데 소중하지 않다면 이상한 거겠지.”
한순간, 진후의 눈 속에서 섬뜩한 광채가 번득였다. 그는 단 몇 걸음 만에 시야에게 바짝 다가섰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너니까 이러는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한시야, 바로 너니까.”
진후의 음성에는 가까스로 억누른 분노가 역력했다. 그가 내뿜는 한기에 굳어진 것도 잠시, 시야는 그제야 비틀린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 당신은 나니까 이런다고 쳐.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떨 것 같아? 난 당신이라서 싫어. 당신이라서 밉고 치가 떨린다고.”
“알아.”
“알긴 뭘 알아! 그때 당신 누나와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귀도에서 당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원망 어린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진후는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그는 더더욱 바짝 시야를 끌어안았다.
분노로 굳어진 입술은 필사적으로 다물어진 채 그를 거부했다. 그러나 진후는 시야의 뺨을 가볍게 누르며 압박했고, 얼결에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결코 그녀의 의지로는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 입맞춤. 강탈하듯 훔친 입맞춤에는 그녀가 품은 원망과 증오가 가득했다.
찰나의 순간, 찌를 듯한 통증이 진후의 가슴을 꿰뚫었다. 조금이라도 시야에게 덜 신경 썼더라면 진즉 피했으련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한시적으로나마 심장을 멈추게 하는 급소를 얻어맞은 진후는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시야는 다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도 모르는 새에 한 행동이었지만 막상 몸이 움직이자 머리가 급격하게 회전했다.
곳곳에 감시의 시선이 득실거리는 유가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단 몇 명의 혈귀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곳, 한강 인터내셔널 호텔에는 한강 라인의 창립 기념행사 때문에 온갖 거물급들이 모여 있는 터. 그것은 제아무리 대단한 유진후라 해도 행동에 제약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잘만 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시야는 문을 향해 긴장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문밖에는 분명 현우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진후의 오른팔인 동시에 유가의 혈족이기도 한 자. 유난히 감이 좋은 그 진혈귀는 제 주인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리라.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밖으로 나갔다.
예상대로 시야가 스위트룸의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은 현우였다. 현우는 차분한 눈빛으로 시야를 주시했고, 진중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귀주께서는 무엇하고 계시기에 아가씨 혼자 나오십니까?”
“그 남자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비켜.”
“아가씨.”
현우가 반사적으로 시야의 팔을 잡은 순간, 그녀는 시린 눈빛을 번득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 손 떼, 유현우. 내가 네놈들의 손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텐데.”
“……죄송합니다.”
현우가 고개를 수그리는 사이, 시야는 냉랭한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저편에는 이미 두 명의 혈귀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단번에 들킬 터였다. 그녀는 현우가 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다리에 속도를 더했다.
일순, 룸 안쪽에서 현우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가씨를 막아! 제기랄, 귀주! 정신 차리십시오!”
빌어먹을……! 시야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현우가 소리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 쪽에 서 있던 두 사내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복사기에서 뽑아낸 듯 똑같은 얼굴은 그들이 유가의 쌍둥이 혈족, 현석과 우석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혈귀의 피는 제법 짙지만 능력만큼은 대단하지 않은 자들. 저들이라면 그럭저럭 그녀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시야는 이를 악물며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아가씨! 멈추십시오!”
두 사내가 팔을 뻗으며 그녀를 붙잡으려 한 순간, 시야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대체 어디로……? 당황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것도 잠시, 현석과 우석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림자처럼 삽시간에 복도 위를 미끄러져 그들의 뒤에 선 시야는 현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크헉……!”
“으아악!”
머리를 얻어맞은 현석이 비틀거린 순간, 우석의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어느 틈에 그녀가 우석의 팔을 잡아채어 비틀어 버린 것이었다. 시야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는 현석을 향해 우석을 밀쳐냈다. 우당탕……! 현석과 우석이 한데 엉킨 채 나뒹구는 사이, 그녀는 곧장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가씨!”
복도 저편에서 뛰어든 현우가 엘리베이터 코앞까지 달려와 손을 뻗은 것과 문이 닫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시야는 20층에서 하나씩 줄어드는 표시를 보며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유진후, ?가 나타나 그녀를 붙잡을 것만 같은 느낌. 그녀는 파르르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게 아무 소용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 아닌 혈귀가 되어 버린 그녀였고, 두 번 다시는 평범한 한시야였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설령 혈귀 일족들이 전부 사라진다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치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듯 달아나려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유진후, 그녀의 전부를 얽어맨 그 남자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다는 것.
‘당신은 내 마음의 반에 반도 몰라, 유진후. 당신 곁에서는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나야. 매일 같이 심장 속 혈관들이 하나하나 터져서 죽어 버릴 것만 같다고. 당신이란 존재 때문에 내 삶이 엉망진창으로 뜯겨진 것도 미칠 것만 같은데, 그런 당신의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야. 나는…… 모든 게 지긋지긋해서 미칠 것만 같다고……!’
일순, 5에서 4로 바뀌던 숫자가 멈칫하면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시야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열려진 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시야 씨? 이젠 괜찮은 겁니까?”
“한세현 씨…….”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세현이었다. 아까 전 연회장에서 잠시 마주친 것이 전부인 사내. 순간적으로 멈칫했던 것도 잠시, 시야는 다급히 그를 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당겼다. 간발의 차로 문이 닫혀 버렸고, 그녀는 빠르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도와줘요, 세현 씨.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세요. 지금 당장……!”
“시야 씨,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녀는 당황 어린 기색이 역력한 세현의 눈을 응시했다. 그것은 더는 묻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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