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참!” 채영이 갑자기 소리치자 남자가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왜요?” “저, 혹시…….” 채영은 낯에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와 키 크다. 딱이다.’ “혹시?” “혹시, 그게…….” ‘당신 어디까지 봤어? 나 스타킹 갈아신을 때 어디까지 본 거야?’ “말해요. 뭐가 잘못됐나요?” “그러니까 그게……. 못 본 걸로 해주세요.” “뭘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이 주차장에서 스타킹을 갈아신을 때 저, 그러니까……. 어디까지 봤어요?” 채영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물었다. “글세, 내가 본 건 매끄러우면서도 탄력 있어 보이는 다리와…….” ‘퇴근 후에 재즈댄스를 배우러 다니길 잘했군.’ “그리고 표범무늬.” ‘표범무늬? 뭐지? 오 맙소사 내 팬티!’ 채영의 얼굴은 곧 터질 듯이 완전히 익어버린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채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꼭 다문 채 아직 열리지도 않은 엘리베이터 문을 노려보고 있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목에 뭐가 걸린 거예요?” “당신이 입이 빨라서 소문내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길 기도하는 중이에요.” 채영은 정말로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억눌린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소문내기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다행이군요.” “다행이라니 다행이군.” “제발, 못 본 걸로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미 다 봐버린 걸 무슨 수로 못 본 걸로 하겠어요.” ‘어허 도발하네.’ “그럼, 입은 봉해주세요.” “그건 약속할 수 있어요.” “다행이군요.” 채영이 낯 뜨거운 심정으로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남자가 채영의 손을 움켜잡았다. 채영은 자신의 손을 틀어잡은 남자의 손을 쳐다봤다.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커다랗고 관절이 무식하게 튀어나온 딱 남자의 손이다. 무엇을 잡아야 할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참으로 명민한 손이지 않은가! 채영이 고개를 획 들고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의 그윽한 눈빛 아니 늑대 같은 눈빛 아니 몹시도 굶주린 눈빛이 한 움큼 부딪혀왔다. ‘저 껍질마저 홀랑 다 까먹을 듯한 시선!’ “뭐, 뭐, 뭐죠?” 채영은 자동반사적으로 꼴깍 침을 삼켰다. “입을 봉하는 대신 나하고 키스합시다.” ‘오호, 세게 나오는데?’ “뭐라구요?” “입을 봉해주는 대신에 키스하자고 했어요.” 채영은 멍해진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세상에 오늘 처음 본 여자한테 키스를 하자고? 그것도 스타킹 갈아입는 걸 못 봤다고 해주는 대신에? ‘거 괜찮은 거래로군.’ “변태죠?” 채영이 구겨지기 시작한 얼굴로 물었고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알기로 난 변태인 적이 없었어요.”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네요.” 남자가 또다시 큰소리로 웃었고 남자의 웃음소리가 주차장 안으로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어째서 내가 변태라는 거예요?” “우리가 만난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그리고 우린 초면이고 그리고 입을 봉해주는 대신에 키스를 하자는데 절대 정상은 아니죠.” “키스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느 정도의 시간? 통하기만 한다면이야 시간이 무에 필요하겠는가.’ “뭐 적어도, 하루나, 필이 통한다면 한 세 시간이라도…….” “좋아요. 세 시간 후에 합시다.” “세 시간 후에요?” 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세 시간 후는 무슨 얼어 죽을, 지금 해 이 자식아!!’ “당신이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알려줘요.” “그걸 알려주면 나도 오늘부로 변태가 되는 거예요.” “당신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군.” “왜죠?” “표범무늬가 아직도 눈앞에서 어른거려 말이에요.” “변태가 틀림없군요!” 채영이 당장에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로 소리쳤다. “그 잘생긴 얼굴에 쌍방향 피물 오선이 그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내 옆에서 썩 사라져요!!” “그렇다면 내 입이 언제까지 봉해져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이봐요, 아저씨!” 채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남자가 굉장히 위험하게 구는 대도 어째서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까? 설마 남자의 장난을 즐기고 있는 걸까? 맞다. 즐기고 있다. “당신 정말로 뜨거운 맛을 보고 싶은 모양인데…….” 그때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뒈지게도 눈치 없는 엘리베이터 같으니라고!’ 채영이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닫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당신이 변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기회에요. 난 혼자 타고 올라 갈 테니 당신은 다음 꺼 타요.” “세 시간 후에 봅시다.” “변태.” “세 시간 후요.” 남자가 입가에 심장이 미쳐 튀어나올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걸쳐놓고 중얼거렸다. 문이 닫혔고 채영은 초인적인 힘으로 주저앉지 않고 두 다리를 버티고 서있었다. 변태한테 걸려 가까스로 빠져나온 게 감사하고 아직도 두려움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아 주저앉을 것 같냐고? 아니, 아니 절대 아니.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저 남자가 가진 마력과 같은 근사함과 섹시함 때문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토록 열렬하게 그리던 이상형의 남자를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다는 짜릿함. “진짜 심봤다.” 채영은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요만큼도 틀리지 않은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웃음을 터뜨렸다. 채영은 알 수 있었다. 가슴 속에서 새빨간 여우가 대가리를 쳐들고 있는 것을. ‘저 남자……. 놓칠 수 없어.’ 채영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오, 나 이러다 정말 결혼하는 거 아니야?” 채영이 들뜬 얼굴로 속삭였다. 그리고 그 새빨간 여우가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세 시간 후! 저 남자는 내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