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삶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뀐것 뿐 사라진 건 아니야. 죽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조금 외롭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 않아. 두려운 건 너를 잊는 일이야. 너를 잊게 되면 사랑을 잃는 거니까.
작가의 새로운 시도로 읽힐 만한 요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와 함께 작가의 피로 또한 엿보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와 '인 마이 라이프'는 손을 가볍게 풀어서 쓰고자 한 자취가 보이고, '지구 반대쪽'과 '여름은 길지 않다'라면 이 후 그와 같은 양상이 더욱 분명해질 때를 기다려 보는 것도 좋다.
--- p. 295
이말은 빠르떼르나끄가 했고, '문장백과 대사전'에 따르면 그 이전에 A.S.그리보예도프가 했다. 언젠가 늦은 밤 우리는 서대문에서 아현까지 가로수의 수를 세기 위해 차를 몰고 거리로 나갔다. 그 날은 비가 왔다. 검게 젖은 포도 위로 불빛들이 흘러다녔다. 일생일대의 느린 운전. 다 세고 나자 그가 물었다. 몇시야? 내가 대답햇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
--- 머리말 중에서
이것은 모두 3년전의 일이다. 시간은 지나간다. 아니다. 시간은 정지해 있고 내가 그곁을 지나쳐 간다.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특급호텔 주변의 건물들을 스쳐지나갔듯이. 그 건물의 수많은 방을 일일이 두드려 보지 않고 그냥 무심코 지나쳐 걸었듯이. 중요한 것은 뒤돌아 보지 않는 일이다.
--- p.53
이 세상이란 갑의 불행이 을의 행운을 가져다주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정도는 나도 일찌감치 깨친 바 있다. 강성배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바람에 사무실의 나머지 사람들이 몇 달동안 불편을 겪었다. 그러나 제손으로 어머니 몫의 행복을 빼앗아 제 앞에 쌓아 놓는 딸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비오는 차창 밖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가 근무하던 은행의 유리문 안을 볼 때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길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습기찬 창이 오래 전부터 입김으로 부옇게 흐려져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나는 눈이 아프도록 그 창에 서린 미망을 바라다 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이제야 자신의 삶을 살게 됐다고 축하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 p.43-44
은희경의 소설에서 매우 다양한 변주를 이루면서도 일관된 주제를 형성하는 것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아내가 있는 남자와의 관계라는 창을 통해 여자인물이 사랑의 의미와 한계를 가늠하고 이로써 삶의 이면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 p.282
어서 도망쳐. 너를 속박하는 시계와 사진,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죽은 자의 저주가 산 자의 운명을 파멸시키지 못하는 태초의 죄없는 시간으로 가란 말야. 그래, 엄마의 첫번째 사진속으로.. 나? 나는 이미 틀렸어. 팔이 빠진 것도 모르고 렌즈를 쳐다보며 울고만 있잖아. 나는 여기 그냥 시간의 그림자 속에 남아서, 너한테 가지 못하도록 세번째 사진 속의 시간을 붙들고 있을게. 너, 가고 있지? 가고 있는 거지, 내 사랑... 뭐라구? 이제 없어져 버렸다구? 오, 안돼!
--- p.129
아버지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라 어머니가 잔소리를 시작했는지 아니면 어머니 잔소리 때문에 그런 성격이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쨋든 어머니 표현대로 '폐병환자' 처럼 폐쇄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낙천적이고 유머가 많았으며, 고등학교 밴드부 시절 불었다는 트럼펫을 꺼내 먼지를 닦을 때는 어린애처럼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취미도 성격 따라간다더니 낚시도 등산도 아니고 하필 방안에 틀어박혀 꼼짝 않는 것만 좋아한다' 는 어머니의 비난을 무릅쓰고 고전음악을 즐겨 들었다. 손재주가 많은 아버지가 썰매나 연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내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탐탁찮아했다. '까짓 구경 그만 하고 빨리 가서 숙제나 하라' 고 채근해도 나는 고집스럽게 아버지 옆에 지켜앉아 있기 일쑤였다.
--- p.32
딸에게 주는 그의 글은 거기에서 끝나있었다. 노트 아래께에 낙서가 몇개 더 있었지만 푸른 플러스펜으로 쓴 글씨가 지저분하게 번져 있거나 군데군데 얼룩이 많아 더는 알아볼수 없었다. 그가 이틀째 인사불성이 되었던 4월 13일은 나도 기억이 난다. 그는 아침이 되어도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하나 남은 사과를 냉장고에서 꺼내 당근과 함께 강판에 갈았다. 정인이를 먹일때처럼 베에 짜서 주스로 만들었다. 내가 윗몸을 일으켜주자 그는 눈꺼풀을 들어올릴 힘도 없는지 두눈을 꾹 감은채 그것을 달게 마시고는 다시 누웠다. 한잠 자고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찬밥에 김칫국물넣고 먹다 남은 나물같은 것하고 같이 들들 볶아서 참기름...
--- p.87
나하고 살면 인생이 바뀔 것 같아요? 그래. 왜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그럼 12년 전에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하고 결혼했던 거에요? 물론 그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결혼을 했겠지.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었어. 당신이 나하고 결혼한다고 해요. 그러면 12년 뒤에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때 어떤 기회가 오면 당신은 또 이번이 진짜 사랑이고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떠나겠죠. 지금 아내한테서 떠나려는 것처럼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가 불쾌한 듯 말꼬리를 잡아챘다. 차라리 나이 많은 남자한테 와서 남의 애 키우며 살기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라. 내가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거니? 날 그런 놈으로 봤어? 넌 정말 나쁜 방법으로 거절을 하는구나. 잘 자라.
--- p.35
나는 필요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많은것을 가졌다. 이를테면 자유와 집착까지를.
--- p.48
그녀가 더브(dove)콤플렉스에 대해 말해주었다. 비둘기 암컷은 수컷한테 그렇게 헌신적이래. 그런데 일찍 죽는단다. 자기도 사랑받고 싶었는데 주기만 하니까 허기 때문에 속병이 든 거지. 사람도 그래. 내가 주는 만큼 사실은 받고 싶은 거야. 그러니 한쪽에서 계속 받기만 하는 건 상대를 죽이는 짓이야. 인연을 맺는다는 건 참 끔찍하지 않니?
--- p.45
경치를 독점하기 위해 높이 담장을 쌓아놓는 사람은 동화속의 거인을 빼고는 아무도 없다. 사랑은 그렇지 않다. 언제까지나 지속된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배타적이 된다. 독점욕이 생기고, 그 독점욕이 구속을 낳는다. 그 때문에 사랑 자체가 파괴된다 할지라도 그 덫을 피할 수는 없다.
--- p.23
“거품을 씻어내다가 문득 손을 멈춘건 네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서 였어. 잠들었나 하고 수건을 가만히 젖혀보았을 때 너는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눈물에 젖어 있던 그 눈. 몇시야?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네가 물었고 그걸 듣자 내 입에서는 뜻밖에 의젓한 농담이 튀어나왔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 라고.”
본문중에서
“거품을 씻어내다가 문득 손을 멈춘건 네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서 였어. 잠들었나 하고 수건을 가만히 젖혀보았을 때 너는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눈물에 젖어 있던 그 눈. 몇시야?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네가 물었고 그걸 듣자 내 입에서는 뜻밖에 의젓한 농담이 튀어나왔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 라고.”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