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이메일을 60-80통씩 받던 사람이 하루에 우편물을 단 한 통도 받지 못하다니, 그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이메일을 받던 당시, 나는 하루에 적어도 60번은 ‘중요한’ 사람일 수 있었다. 내 영혼의 배고픔을 채우는 달콤하고 따뜻한 식사를 60번씩 하며 손에 젖병을 쥔 아이처럼 관심과 이해, 사랑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시간만큼은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인 동시에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사람일 수 있었다. ---「12월. 분주함을 버리고 지혜를 찾다」 중에서
‘이번만, 아주 잠깐만, 후딱 보자….’ 이것이 인터넷에 중독된 내가 스스로를 속이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딱 한잔만 더하자.”라고 말하듯이, 나도 매번 나 자신에게 ‘이번만, 아주 잠깐만, 후딱 보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사를 쓸 때도 각 단락을 끝내면 나는 짧게나마 인터넷에 접속했다. 어느 주말에는 이메일을 40통이나 보낸 적도 있었다. 그래야 정말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고 월요일의 업무 부담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일은 주말에 아이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지내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시골 농가에 머무를 때도, 친구가 보내기로 한 메일 한 통이 도착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30분마다 방으로 올라가 보곤 했다. 어느 날 내가 재빨리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본 아들 녀석은 내가 혹시 배가 아파서 그러는 것이냐고 물어 왔다. 아니, 배가 아픈 게 아니라 그냥 블랙베리가 보고 싶은 거야. ---「12월. 분주함을 버리고 지혜를 찾다」 중에서
길고 지루하게 느꼈던 시간은 기억 속에서 작은 점이 되어 버리고, 짧게 느껴졌던 시간은 반대로 기억 속에서 커다란 공간을 차지하곤 한다. 전에는 몇 시간이고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십 가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감자 칩 먹듯 쉴 새 없이 자기 안으로 쑤셔 넣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종일 자기가 무얼 봤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에게 텔레비전을 보느라 소비한 시간은 텔레비전을 끄는 동시에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인터넷을 하느라 종일 시간을 보내던 나 또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하루가 너무나도 짧게 느껴질 만큼 종일 컴퓨터 속을 들락거리며 뉴스를 보고, 기사를 쓰고, 저녁에는 영화를 보고, 중간중간 군것질을 해댔지만, 컴퓨터를 끄는 순간 내가 그 안에서 보낸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1월. 날마다 인터넷을 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들」 중에서
부퍼탈로 가는 기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그들은 예외 없이 모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 나는 일단 두 번이나 기차 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는 사람, 책 읽는 사람, 창밖을 보는 사람 혹은 오프라인 상태로 다른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이 있는지 세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말이다. 뭐, 좋다. 기차 칸에 자리가 많이 비어서 승객들을 다 합쳐 봐야 16명 정도밖에 안 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단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지?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창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전봇대는 악보의 종선이 되고, 전선 위에 앉은 새들은 음표가 된다. 그런데 저들 중에는 지금 막 창밖에서 뉘른베르크의 전봇대들이 만들어 내는 미제의 악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2월. 비로소 삶이 보였다」 중에서
이상하게도 문득 문득 경련처럼 찾아오는 욕구가 있다. ‘구글 검색을 하고 싶다!’, ‘인터넷 서핑을 하고 싶다!’, ‘이제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이메일들과 읽고 싶다!’라는 욕구 말이다. 마치 껌을 씹고 싶거나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처럼 이들도 예고 없이 나를 찾아온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했던 것처럼 아마 나도 다른 사람을 통해 나의 즐거움을 대리 충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결핵에 걸려 더 이상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없었을 때, 카프카는 키얼링Kierling에서 나와 어느 술집에 들어가서는 그곳에 있는 아무 손님에게 맥주 한 잔을 사 주곤 했다. 그리고 그 손님이 시원한 맥주를 맛있게 들이켜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가 내 이메일을 읽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리 만족을 느껴야 하는 걸까?
---「2월. 비로소 삶이 보였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