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사를 다 읽은 그녀는 천장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리고 히죽히죽 웃는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벽에 걸린, 언젠가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죽어 있는 시계, 시계 안의 시간을 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시계에 밥을 준다. 그녀의 가슴에 오랫동안 꺼져있는 불이 하나씩, 천천히 켜지고 그녀의 잠든 감각들이 기지개를 켜고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라진 왕국의 옛 열정이 살아난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본다. 처음 만난 날의 모습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웃음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벅찬 감동으로 남펴의 볼을 잠시 손으로 쓸어내린다. 이상한 슬픔과 연민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꼭 여인숙에서 잃어버린 것만은 아닌 그 무엇의 정체가 순간 그녀 안으로 날카롭게 꽂힌다. 그녀가 잃은 건, 잠든 남편 역시 잃어버린 건 바로 열정을 동반한 사랑, 삶이다. 그것을 잃어버린 것은 남편도, 그녀의 탓도 아니다. 그건 그저 시간의 덫일 뿐이다. 그러나 열정을 동반한 사랑의 상실 뒤에 또 다른, 형태는 다르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서 느끼는 연민...... 나른하고 무관심하고 서로에 대해 무지해지고...... 그 모든 것을 겪은 후 찾아오는 서로에 대한 연민이라는 안정된 애정...... 그 순간 남편의 팬티 안에 그녀의 장난감이 수줍게 그녀를 향해 서 있다. 그녀가 바라는 열정적인 사랑은 아니지만 연민과 서로에게 우정 같은, 아니 우정을 넘어선 가족애에 대한 따뜻한 물기가 그녀의 가슴에 흐른다. 인생이란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무엇으로 채워진다는 것...... 뜻밖의, 살아갈 수 있는 무언가가 선물처럼 온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살아간다는 것...... 빗소리와 파도 소리가 그녀에게 아주 오랜만에 수면제처럼 그녀를 부드럽게 감싼다. 분노와 욕구 불만과 남편에 대한 살의의 충동으로 가득 찬 그녀의 경직된 마음과 몸은 이완되고 편안하다. 그녀는 남편의 팔에 머리를 올려놓고 한 손은 남편의 등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향해 수줍게 세워져 있는 그녀의 장난감을 살며시 쥔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평화를 느낀다. 그녀는 가물가물 졸다 깊은 잠 속으로 빠진다. 그녀의 잠든 얼굴은 남편의 그것과 똑같고, 남편의 고른 호흡에 나란히 박자를 맞추며 깊은 잠으로 빠져들어간다.
--- pp.238-239
대학을 간 여자는 대학을 나올 때 갈 데 없는 실업자 무리중 하나였다. 많은 여대생들이 할 수 없이 결혼을 취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여자도 그들중 하나였다. 사랑없이 결혼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 할 수 있는 다른 삶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결혼에 있어 사랑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결혼은 선택일 수 없는, 할 수밖에 없는, 남자가 아닌 사회의 덫에 걸린 것이다. 남자는 그걸 잘 이용했다. 그 덫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지만 잘 이용할 줄은 안다. 여자는 남자에 의존했다. 마치 타고난 본성처럼 의존적인 인간이 되어 버렸다.
아주 사소한 일을 결정할 때도 꼭 남자의 의사를 듣고 그가 그렇게 해, 잘했어, 하면 그때서야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전적으로 옳은 결정이라 해도 남자의 결재가 나지 않으면 틀린 것 같았다.
--- p.287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보려구 해요. 나도 힘들어요. 이러고 싶지 않아요. 날 잃고 내가 했던 많은 일들을 하려면 힘들 거예요. 당신 집안의 남은 돈은 이미 동생이 다 날렸어요. 당신은 이제 형으로서 동생을 도와야 해요. 어머니의 치매는 점점 심해져요. 당신은 자식된 도리를 처음으로 해봐야 해요. 아이들은 커가면서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겠죠. 당신은 처음으로 아이들의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할 거예요. 힘들고, 지겹고, 죽고 싶을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하다 보면 당신도 뭘 알게 될 거예요. 자신에 대해. 당신이 좋아하는 인생에 대해서 말이에요. 연애에서만 자신을 알고 인생을 아는 게 아니거든요.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걸 제대로 알려면 부모가 뭔지, 자식이 뭔지를 한번 지옥처럼 겪어봐야 해요.'
--- pp.307-308
길을 걷다 보면 문득, 까닭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설 때가 있다. 돌아가자니 이미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거, 앞으로 가자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때, 말이다. 지금 내 심정이 그런가. 막막하지만 별 수 없다. 너무 오랫동안 서 있을 수는 없다. 오직 나 자신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 p.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