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음’ 하면 보통 능력이나 기적을 연상합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이 그런 것과만 관련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이처럼 기름부음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진리를 분별하고 밝히 이해하게 해줍니다. 진리를 옳게 분별하려면 성경을 읽고 학자들에게 배우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행 18:24-26)
저는 아볼로에 관해 읽을 때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강해설교자들이 생각납니다. 아볼로의 한계가 바로 기름부음 없이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는 대다수 목사와 교수들의 한계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우리나라에 이런 목사와 교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것처럼 그들도 물세례만 압니다. 성령세례와 그 표징인 방언과 성령의 기름부음과 은사와 역사에 대해서는 심히 무지합니다.
반대로,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아볼로 이상으로 학문과 성경에 능했으나 그것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께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회심하기 전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으나 회심 후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옳게 이해했고 신약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와 교수들은 기름부음이 아니라 학문과 성경지식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고 주로 가말리엘 같은 학자들에게서 배웁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고 성령님에 대해 병적일 정도로 배타적입니다. 이제는 그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목사와 교수들이, 지적인 면은 아볼로를 닮았는데 아볼로처럼 겸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서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들과 교수들은 전반적으로 너무 교만합니다. 그래서 평신도에게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조차도 거절합니다. 그 결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일어난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 목사나 교수라면 그 타이틀을 내려놓고 아볼로처럼 겸손한 자가 되십시오. 가르치기만 하지 말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눈이 열려서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본서를 읽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배운 깨어 있는 평신도들이 여러분을 저만치 추월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