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잠시 탈출하기
김기옥 (flytoafrica@yes24.com)
2015-08-05
"… 나오미는 그리 헌신적인 성품이 아니었지만 일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자세가 낮아졌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지 않은 만큼 자신을 억누르고 고객에게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타일렀다. 최근 들어서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이면 고객의 건강이 진심으로 걱정됐고, 태풍이 상륙하면 고객의 집은 괜찮은지 신경 썼다. 나오미는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했다." - p.14
얼마 전 친구들과 왜 ‘나는 가수다’ 라든지 ‘복면가왕’ 같은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영화를 보고 운 적은 있지만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적이 없어서 그런 경우는 ‘연출’이 아니겠냐는 의견이었는데, 다른 친구는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적은 있지만 영화를 보고 운 적은 없다고 말해서 적잖이 놀랬었다. 울거나 울지 않았거나, 어떤 컨텐츠가 사람에게 강한 울림을 주고 기억에 남으려면 내 상황과 겹쳐져 감정이입이 되어야 한다. 그 친구는 가수가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이 노래를 했을 때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하고 싶었던 일은 따로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어쩌다 이 일을 하고 있었고,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일이 있었기는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하고 있는 일에 적응되어 가고 있는 사람이 나오미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그러려니 하고, 한 발짝 물러나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그런 일상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런 저런 사정들로 인해 차마 그럴 수 없는 것이 모든 직장인의 현실이다. 가정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상황을 이런 저런 이유들로 차마 떨쳐버리고 나오지 못하는 가나코에 나오미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지 않았을까. 가나코가 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괴로운 현실을 깨뜨리지 못하는 모습이 나오미의 어두운 가정사와 함께 얽혀 더욱 ‘남의 일’ 같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나오미이기에, 물건을 훔치고도 뻔뻔하게, 혹은 대범하게 그 상황을 벗어나는 리아케미를 보고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한 인물이지만 오히려 좋아하고 경외심을 갖기에 이른다. 그리고 리아케미를 자신들이 하려는 ‘일상의 파괴’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희망을 품는다.
소설은 나오미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가나코의 시점으로 끝난다. 나오미와 가나코가 ‘가나코의 남편 살해’라는 사건을 꾸미고 실행하는 전반전이 나오미의 시점이라면, 완전범죄를 꿈꿨던 두 여자가 점점 좁혀오는 수사망에 목이 죄어들어오는 후반전이 가나코의 부분이다. 살인은 절망적인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치못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한 존재를 강제로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일은 보통 용서받기 어렵기 때문에 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시점이 전환되는 책의 절반 부분에서 참지 못하고 뒷 부분을 펼쳐 결말을 확인해버릴 뻔 했다. 책의 마지막 장에, 오쿠다 히데오의 ‘결말을 어떻게 할 지 작가도 마지막까지 망설인 소설입니다’ 라는 수줍은 한 마디가 492페이지를 달려오는 동안 독자를 쥐락펴락한 사람이 할 소린가 싶어 얄미울 정도로 이 소설은 읽는 모든 사람이 다같이 나오미와 가나코의 공범이 된 듯 마음을 졸이게 한다.
추리소설이 으레 그렇겠지만,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은 잘 깎은 쇠 톱니바퀴처럼 기분좋게 찰칵거리며 맞물려 돌아간다. 만약 리아케미가 시계를 훔치지 않았더라면, 가오코의 남편과 꼭 닮은 중국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치매 노인을 고객으로 받지 않았더라면, 나오미와 가나코는 현실을 떨쳐낼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이렇게 잘 깎여진 이야기 속에서 나오미와 가나코는 탈출구를 향해 가속도를 내며 달려가고, 독자도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뒤로 갈수록 모든 등장인물이 다음 이야기의 복선을 품고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을 품는 이상 현상을 겪으면서.
하지만 모 예능에 출연한 표창원 교수가 ‘추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듯이, 그렇다면 당신은 이 매력적인 추리소설을 마음껏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나오미와 가오코처럼 이런 저런 사정때문에 지겹게 나를 옭아매는 일상을 ‘죽여버릴’ 용기는 차마 쉽게 낼 수 없다. 하지만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나오미와 가오코에 제대로 감정이입하고 응원하다보면 이 무더운 여름밤만은 시원한 소나기처럼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