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를 위하여
- 다들 겁먹어서 이류 모텔에도 못 들어갔잖아. 우리가 그렇게 위협적인가?
- 너한테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네게서 보이는 것에 겁을 먹은 거야.
- 그래 봤자 머리 좀 기른 것뿐이잖아?
- 그게 아냐. 그들은 네게서 자유를 본 거지.
- 영화『이지 라이더(Easy Rider)』중
나의 이니셜은 R, 직업은 여행작가, 성 정체성은 다성애자로 후천성 샛길 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리고 샛길은 ‘물리적인’ 샛길일 때도 있고 ‘정신적인’ 샛길일 때도 있다. 내가 왜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인지는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를 읽는 동안 다양한 임상 사례들을 접하며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영어로는 ‘Acquired Byroad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물론! 세계보건기구(WHO)의 질병 분류에 그런 병명이 등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의 질병 분류 코드에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천성 샛길 증후군이 언제 WHO 질병 분류에 등재될지는 알 수 없지 않겠는가.
후천성 샛길 증후군이 발병한 시기는 내 나이 열네 살, 어느 날의 하굣길이었다. 길동무가 물었다. “너 장기 둘 줄 아니?”, “응, 이모부한테 배웠어.” 무심코 대답하고 나서 나는 (정신적) 샛길로 빠져 여러 해 동안 이모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고, 이어 이모부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 순간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내 곁에도 죽음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였다는 것. ‘난 왜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말하자면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누구나 겪는 ‘사춘기’를 ‘후천성 샛길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내가 내린 결론이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카프카처럼 열다섯의 어느 날 정신적 탯줄을 끊고 길을 떠났다. 일컬어, 가출(家出). 물론 ‘열다섯 살의 생일’은 가출하기에 안성맞춤의 시기라고 말하는 카프카와는 달리 ‘열다섯 살의 크리스마스’에 가출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15세 소년에게 이 나라는 무수한 도시들로 가득한 미로였고, 산과 강들이 즐비한 대륙이었으며, 실핏줄처럼 이어진 길들로 가득한 생명체였다. 15세 소년소녀들의 일상에서 벗어나 (물리적) 샛길로 빠진 나는 버려진 방범 초소에서 잠들기도 했고, 지리산에선 MT 온 대학생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고, 낯선 집 대문을 두드려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며, 겨울 강변에 장작불을 지피고 밤을 지새기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로드 페로몬(Road Pheromone)에 홀린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가 되어 있었다.
후천성 샛길 증후군은 고요히 잠복을 하고 있다가 바람 부는 날, 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뒤집히는 모습을 보게 되거나 할 때면 어김없이 발병했다. 숲은 푸른 혓바닥을 내밀어 내 눈알을 핥아댔고, 나는 달아올랐고, 견딜 수 없을 때면 길을 떠났다. 물론 잠복기가 꽤 길었던 시절도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빌딩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펜대를 굴리던 시절. 식사를 하고, 회의를 하고, 영화를 보고,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또 다른 내가 거실의 TV 앞에 앉아 저녁 뉴스를 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시절이었다. 사무실 인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와 자판기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내가 나인지 커피를 뽑고 있는 저 양복 입은 사내가 나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매트릭스(The Matrix)』의 무한 복제된 스미스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때 다시 발병한 후천성 샛길 증후군은 ‘질병’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후천성 샛길 증후군은 나를 기차선로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는 Korean Express에서 샛길로 끌어냈고, 나는 그때부터 샛길 방랑자가 되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힐 때면 나도 어느 한쪽으로 뒤집혀 깊이를 알 수 없는 길들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 사람들이 이제 소용없다고 버린 것들을 내 몫의 지문으로 움켜쥔 채 떠올랐다. 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까, 이 땅은 다시 은둔하는 절경들을 감춘 미로가 되고, 수많은 산과 강과 바다를 품고 있는 대륙이 되어주었다.
그 길 위에서 여러 여행자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여행길에서 무엇을 타고, 어디에서 자고, 어느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무엇을 볼지 모든 것을 정해놓아야 안정이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그들이 ‘?제’를 하러 온 것인지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지곤 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꼼꼼한 ‘정보’나 빈틈없는 ‘일정’이 아니라 여행을 대하는 ‘자세’이고, 여행의 정수는 예측할 수 없는 만남과 모험에 있는 것. 그것은 결코 차질 없이 처리해야 할 숙제가 아니니까. 삶이 여행이고 여행이 곧 삶이듯, 삶과 여행이 아름다운 건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꼼꼼한 계획에 따라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는 여행이란 ‘박제된 동물’을 관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물론 박제된 동물의 앞태, 뒤태, 옆태, 발톱과 털의 생김새 등등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곳에 ‘생명’은 없다.
내가 샛길 증후군을 ‘후천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병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이 병에 감염될 수 있으며, 언제라도 ‘ 샛길 증후군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대가 혹시 Korean Express에 올라타고 있다면 잠시 내려 샛길에서 자유의 향기를 맡아보지 않겠는가. 삶은 한쪽 방향으로만 뻗은 기찻길이 아니라 여러 갈림길로 얽혀 있는 거미줄이며, 세상엔 360도 어느 방향으로든 제 나름의 샛길들이 무한정 존재한다는 것을 느껴보지 않겠는가.
나는 이 책 곳곳에 후천성 샛길 증후군의 씨앗들을 뿌려놓았다. 부디 그대가 감염되길 바란다. 하여 샛길로 떠난 그대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샛길에서 돌아온 그대의 삶이 더욱 행복해지길!
2009년 초여름 R로부터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