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야구는 어렵다.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그렇지만 한번 손이 닿은 이상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게 야구의 치명적인 마력이다. 연애로 치면 '나쁜 남자'라고 할까? 야구장에 드나든 이후 부모님은 내게 “남자친구 생겼냐”고 묻지 않으신다. “그래요, 연애보다 야구가 좋아요. 나, 야구랑 연애할래요." ---'프롤로그' 중에서
나는 중계 제작진 지시 사항을 들을 수 있도록 이어피스를 귀에 꽂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 “연장 승부인데 질문이나 제대로 할까?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X을 왜 데려오고 그래? 저렇게 무작정 방송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뒤에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상소리가 이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욕설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LG가 역전승을 거뒀고, 당시 김재박 LG 감독과 인터뷰를 할 차례였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빈자리엔 출처를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 내겐 '캔디 콤플렉스' 같은 게 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고 씩씩해져야지. 나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보통 질문 3개면 인터뷰가 끝나지만 네 번째 질문을 내 맘대로 해버렸다. 너무 민감해서 이전에는 미뤄놨던, 번트에 대한 질문이었다. “요즘 박경수 선수가 굉장히 잘 치고 있는데요. 이상하게 박경수 선수 타석에 번트 상황이 자주 나옵니다.” 침을 꿀꺽 삼켰다. 감독의 작전에 관한 질문은 해설위원이나 베테랑 기자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이곳의 관례다. 야구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했다가 혼쭐나기 십상이다. 게다가 김재박 감독은 평소 '번트는 소극적인 공격법'이라는 의견에 좀처럼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에요. (마음껏) 때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보다는 팀 승리가 먼저죠. 박경수 선수도 이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김재박 감독이 의연하게 답해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건방진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Part 1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X '중에서
왼손 신데렐라 KIA 양현종
-2009년 12승5패 평균자책점 3.15를 기록했어요. 지난 2년간 성적이 1승7패였는데 정말 대단한 성장이에요.
"(윤)석민이 형이 선발로 나가는 날마다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요. 너무 부럽더라고요. 전 패전 처리였으니까 언제나 관중들의 뒷모습을 봐야만 했죠. 그때 다짐했어요. 지금 뒤돌아가는 저분들이 언젠가 나를 보러 야구장에 찾아오게끔 잘 해야겠다고 말이죠. 그때 서러움이 제게 좋은 경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2009년 올스타전도 본인이 직접 가고 싶다고 말했죠?
"동기인 김광현이나 임태훈이 주목받는 걸 보면서 항상 부러웠어요. 골든글러브 시상식에도 꼭 가보고 싶어요. 그래서 선배들한테 어떻게 해야 후보가 될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집에 있어라'고 하셨어요. 또 석민이 형이 작년에 페어플레이상을 받았는데 저도 받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심사위원들에게 한마디 해보세요.
"석민이 형 말로는 심판들에게 어필을 안 하면 받을 수 있대요. 그래서 어필 하지 않고 열심히 던지기만 했어요. 심판 선생님, 사랑합니다! 작년처럼 집에서 간식 먹으면서 골든글러브 시상식 보기는 싫어요.”
내겐 직업병이 생겼다. 매일 인터뷰를 하다 보니 소개팅에 나가서도 끊임없이 질문만 쏟아낸다(그래서인지 소개팅이 끝나면 일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사람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도 생겼다. 가뜩이나 눈치 보며 살아왔는데 여러 사람을 만나며 몸짓과 표정을 보게 되니까 적중률이 꽤나 높아졌다. 2008년 어느 날. 양현종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보기 안쓰러울 만큼 안타를 많이 맞았다. 그의 얼굴에 쓰여 있는 불안, 초조, 좌절. 어린 선수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데 2009년 봄에 본 양현종 선수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투구의 발전을 알아볼 수준은 아니지만 표정은 분명 그랬다. 투구 동작마다 자신감에 넘쳤고, 순한 눈빛이지만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안타를 맞아도 흔들리지 않았다. 양현종 선수는 1년 만에 KIA의 왼손 에이스가 됐다. 젊은 선수들의 무서운 성장을 지켜보는 것 또한 일의 재미다. 골든글러브 얘기할 때는 귀여운 소년 같았는데, 마운드에서는 어떻게 저리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를 보며 나를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마흔에 흘리는 눈물 KIA 이종범
-이종범 선수가 더 오래 야구하기를 바라는 팬이 많은데요. '내가 이것만은 이루고 은퇴하겠다'고 정해놓은 시기가 있나요?
“제가 일본에서 4년을 뛰었기 때문에 개인 통산 기록을 세울 수는 없어요. 제 꿈은 하루하루 정말 열심히 야구하는 것입니다. 하루가 모여 한 달, 한 달이 모여 1년이 되면 그 자체로 기록이 되고 의미가 되겠지요. 지금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은퇴하는 날까지 내가 아닌 팀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종범 선수에게 야구란 무엇인가요?
“야구로 성공했고 실패도 했어요. 행복할 때도 아쉬울 때도 난 야구장에 있었습니다. 야구를 통해서 사회를 배우고 인생을 배웠어요. 그래서 제게 야구는 너무나 소중하고 또 간절합니다.”
내가 야구 아나운서를 시작한 뒤 얼마 안 돼서 이종범 선수의 은퇴 문제로 시끄러웠다. 야구를 모르는 나도 알 만큼 그는 대단한 선수다. 많은 기록과 영광을 이뤘는데 도대체 왜 힘든 선수 생활을 계속하려는 것일까. 연봉도 많이 깎인다는데 말이다. 이종범 선수와 인터뷰해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그에게 야구는 단지 직업이 아니다. 인생 그 자체다. 젊은 시절만큼 빠르지는 못하겠지만 뛸 수 있는 데까지 뛰고 싶은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우승을 맛보고 싶어서, 타이거즈가 원래 강한 팀이라는 것을 후배들과 함께 증명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던 이종범 선수를 보며 나도 찔끔 울었다. 내 기준으로 그의 야구를 직업처럼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이종범 선수에게 미안했다. 나도 내 일을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Part 1 석류의 인터뷰 다이어리' 중에서
야구 중계에서 꽤 많이 듣는 단어가 체인지업(Change-up)이다. 투수들에게 주무기를 물어보거나 타자들에게 안타를 친 구종을 물어보면 “체인지업”이라고 답하는 선수가 제법 많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라고 한다. 체인지업은 변화구가 아니라 완급 조절을 뜻한다. 직구를 던질 타이밍에서 직구처럼 던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일종의 속임수다. 모든 변화구는 아무리 버릇을 감추려 해도 던지는 순간 피칭 템포가 느려지게 마련이다. 체인지업은 직구와 똑 같은 폼으로 던진다. 불리한 볼카운트, 또는 치고 싶은 의욕이 앞선 타자는 방망이가 쉽게 나간다. 그런데 체인지업은 공 스피드가 줄어들며 밑으로 약간 떨어지기까지 하면서 배트를 피해간다. (중략) 구종은 공부할수록 어렵다. 현장에서 전문가들의 설명을 직접 들어도 그렇다. 내 이해력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고, 변종이 많아 쉽게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기를. 타자도 자신이 때린 공의 구종을 정확히 알지 못할 때가 많단다. 심판위원이나 중계팀, 전력분석원 등도 마찬가지다. 한 투수 코치는 구종에 정답은 없다. 알 필요도 없다. 기본적인 원리만 알면 야구를 재미있게 즐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씀해주셨다. 격려인지 위로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고마웠다. ---'Part 2 직구는 뭐고, 변화구는 뭘까?' 중에서
야구 중계를 듣다 보면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달콤한 점? 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쳐낼 수 있는 부분을 뜻한다. 우리 표현으로는 '배트 중심'이다. 야구방망이뿐만 아니라 골프 클럽이나 테니스 라켓에도 '스위트 스폿'이 있다. 공이 날아오는 힘이 있다. 또 방망이가 나가는 힘이 있다. 두 힘이 충돌할 때 손실되는 에너지가 적어야 타구가 멀리 나간다.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면 그만큼 효율적인 배팅이 된다. 홈런타자들에게 “홈런 칠 때 '손맛'이 있다고 하잖아요. 어떤 느낌이에요?”라고 몇 번 물었다. 대답은 모두 비슷했다. 타격을 하면 크건 작건 손에 진동이 전달된다. 빗맞으면 투구의 힘이 손에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플 정도로 찌릿하다. 투구의 힘을 이기지 못한 방망이가 부러지기도 한다. 반면 투구가 '스위트 스폿'에 정통으로 맞으면 진동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기분 좋은 울림 정도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달콤하다고 표현하나 보다. 스위트한 느낌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 그런데 불가능하다. 공을 맞힐 줄 알아야 손맛을 볼 텐데. ---'Part 2 0.4초의 미학, 타격에 도전하다' 중에서
“직구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노리고 있었다.” “타자가 변화구를 노리는 것 같아서 직구로 승부했다.”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한때 목동구장 홈 더그아웃에는 ‘Batting is timing, Pitching is upsetting timing(배팅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타이밍을 빼앗는 것이다)’이라는 글이 써 있었다. 타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고, 투수는 타자 타이밍을 뺏는 공을 던져야 이긴다는 것이다. 그럼 뭐야? 가위바위보잖아? '친구가 두 번 연속 가위를 내서 날 이겼으니 이번에는 아니겠지' 하고 보를 냈는데 또 가위가 나와 진 기억이 있을 것이다. 투수와 타자들의 두뇌게임도 마찬가지다. 타자는 '직구 2개로 투스트라이크를 먹었는데 설마 또 직구를 던지겠어?'라며 변화구를 노리다가 빠른 공에 허를 찔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 배합에는 숱한 이론이 있다. 투수마다 보통 3~4가지 구종을 가지고 있고, 던지는 코스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투수가 타자를 이길 확률이 높은 이유다. 타자도 노림?가 있지만 승률은 높아야 30%, 낮으면 20%다. 그러니 “밥만 먹고 야구하는데 저것도 못 쳐?”라고 비난하지 마시길.(중략) 투수와 타자의 승부가 '30% 승률로 밀고 당기는 가위바위보'라고 생각하니 이해하기가 편해졌다. 심오한 두뇌게임을 가위바위보에 비유하느냐는 포수들의 불평도 받아봤지만, 난 더는 모르겠다. 진실은 저 너머에. 어느 날, 야구장 한쪽에 앉아 야구 관련 서적을 보고 있었다. 모처럼 폼 잡고 공부했더니 지나가던 삼성 양준혁 선수가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라고 했다. 친절도 하시지. 마침 잘됐다. “양준혁 선수는 홈런도 많지만 볼넷도 많이 얻잖아요. 비결이 뭐예요? 가위바위보예요?” 천진하게 묻는 내게 양준혁 선수는 “당연히 공을 보고 골라내는 것이지. 나는 노리고 때리는 것보다 보고 치는 게 더 많아.” 저런, 0.4초 안에 그게 가능한가? 생각해보니 두산 김현수 선수도 특정 공을 노리지 않고 친다고 했다. LG 박용택 선수는 컨디션이 좋을 때 투구가 잠시 멈춘 듯 느껴진다고도 말했다. 시속 150km 공이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고? 괜히 물어봤네. 가위바위보로 알 때가 속 편했는데. 이들은 초능력이라도 가진 것일까?
--- 'Part 2 투수와 타자의 수 싸움을 읽어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