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인문사를 곰곰이 씹어 보면 '건강과 긴장'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프랑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 시민 혁명 그리고 사르트르와 카뮈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그 뒤를 이어 구조주의, 해체주의 등. 한 번의 휴지기도 없이 프랑스의 지성계는 토론이 끊이질 않았고 비판과 비판이 그 뒤를 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함에 주저하지 않는 프랑스의 지식인들. 그런 풍토가 일상화된 프랑스의 모습은 흠모의 대상이자 질투의 대상이다.
90년대에 들어 국내에도 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프랑스 현대철학과 관련된 서적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건전하고 솔직한 토론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환경에서 그들 사상의 문맥을 파악하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의 책이 소비될 수 있었던 것은 사르트르, 레비-스트로스, 질 들뢰즈, 알튀세르 등 그 이름이 상징하는 지성에 대한 매력인 듯하다.
이 책의 저자 카트린느 클레망은 철학소설 『테오의 여행』을 쓴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다. 1939년에 태어난 그녀는 프랑스 철학의 세 마디를 경험한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가 휩쓸었던 50년대 말까지가 첫째 마디이며,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62년)와 함께 불어닥쳤던 구조주의 열풍이 둘째 마디, 그리고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앙티오이디푸스』(72년)오 시작된 포스트구조주의, 베르나르-앙리 레비 등의 신철학이 그 셋째 마디이다.
이 철학서는 소설 속 ‘나’인 카트린느 클레망과 친구 줄리앙이 「1945년에서 1989년 사이의 프랑스 지식인들」이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에게는 사르트르, 레비-스트로스라는 이름이 책 안에만 있는 죽은 이름이 아니었다. 동시대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함께 호흡한 살아있는 이름이었고, 대화가 가능한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카트린느 클레망과 줄리앙의 삶 속에 녹아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들의 모습은 너무도 생생하다.
"그들은 성인들이었습니다. 그건 어른들이었다는…….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급격히 등장하기 시작했고, 소설과 샹송, 연극 대본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카페에서 벌어진 그들의 밤 파티와 부기우기로 들추어진 여자의 치마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카프카, 재즈, 미국 소설 등을 발견했고, 한껏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바로 그들이 전쟁의 고통을 씻어내는 역할을 했고, 삶을 향유했죠. 그들은 그럴 기회를 가졌던 겁니다! 보세요, 우리는, 어린 우리들은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삶을 구가하는 동안 우리는 노력했습니다. 혼동하지 마세요. 우리는 심각했습니다. 엄청나게 심각했지요. 대학에서, 고등학교에서, 끝없는 세미나로 이어지는 고등 사법학교 문과 수험 준비반에서."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대립 역시……. 그들은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전투를 시작했지요? 그들은 소비에트 신화에 대립했고, 그 신화를 공격하거나 옹호했으며 의식을 분열시키지 않았습니까? 사르트르는 헌신적인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라고 카뮈를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카뮈는 골수 마르크시스트라고 사르트르에게 반박했죠? 우리는 관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싸우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논쟁을 종식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전쟁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상의 전선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하고, 집단의식의 조각들을 대충 기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코 한 코 직물을 짜듯……. 하지만 그 직물은 너무 낡았었지요. 의식의 직물은 구멍이 나버렸습니다."
사르트르와 카뮈에 관한 그들의 대화이다.
60년대에 들어 “사르트르는 젊음을 상실한 채 늙어버린 청년처럼, 카뮈는 활기 없는 따분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55~60년 사이에 문학에서 누보 로망이, 영화에서 누벨 바그가, 사상에서 구조주의가 싹을 틔웠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의 휴머니즘을 낡은 이야기로 만들어 버렸다.
"불쌍한 사르트르!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되풀이하면서 그는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성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던 거죠. 이성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즉 이성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은 『야생의 사고』였습니다."
"1962년 『야생의 사고』로 레비-스트로스는 역사의 이면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유럽의 학자들이 당시까지 '원시적'이라 했던 인간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고에 대한 충만한 열정. 우리는 '야생적' 인간들의 사고를 거슬러 올라갔고, 이제 레비-스트로스는 그 사고를 우리가 마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변화되지 않는 우리 자신의 사고이기 때문이죠. 원시인들은 천성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 사고는 여러 가지를 뜯어 맞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철학은 모든 사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닌, 생명의 전체적 여건들 속에 있는 작은 부분”에 다시 앉혔고, “인간에게서 거대한 의식의 오만을 박탈”했다. 미셸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61년), 『임상의학의 탄생』(63년) 등 연이은 '작품'으로 “이성의 전제적 측면”을 공격했다.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자크 라캉은 이 시기의 무의식에서 '아버지―어머니―나'의 오이디푸스적 삼각형 구조를 발견했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구조의 '냉정한' 역사가 사건들의 `열정적인'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설파했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구조주의적으로 다시 짰다.
그러나 이들이 제창한 완강한 구조의 건축물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압력을 받고 “쉽게” 무너졌다. 68년 5월 학생혁명이 그것이다. 실존주의로 아름다웠던 시대 이후 구조주의는 지적 토대를 재건했다. 68혁명의 주축이 되었던 학생들은 세계 재건의 생활을 공유했으며 재미없고 딱딱한 구조주의를 공부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진실을 분명하게 하고자 했다.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드디어 사람들은 68년에 10년간 구조주의에 의해 저지되었던 감정들이 다시 출현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건의 폭발에 영향을 받은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오이디푸스』에서 라캉의 삼각형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아버지-어머니-나`라는 가족주의의 틀 즉, 오이디푸스의 구조를 폭파시켜버렸다.
"분명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핵심을 찔렀습니다."
"철학자와 정신분석학자인 그 두 사람은 흥미롭고 참신한 인물들이었습니다. 특히 70년대의 정신을 구체화했죠. 구조? 감옥? 그 이후 사람들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비슷한 때에 자크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서 남근중심주의를 찾아냈다. “이성과 남근은 한통속”이었던 셈이다. 그는 레비 스트로스와 라캉을 남근중심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남근중심주의'는 거의 동시에 여성해방, 동성애자들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운동의 화려한 출현과 함께 1970년 강력하게 들이닥쳤다. 시위, 팜플렛과 함께 여성해방과 동성애 문제가 공식화되었고, 이 문제는 가족과 출산이라는 이름으로 괴롭혀온 상징적 남근에 집중된 남성적 지배를 비난했다. 남근중심주의는 사회의 남성적 요소들을 사회적 압제로 지칭했다. 여성들과 동성애자들의 저항은 낙태와 동성애를 금하고 있는 공화국 법률을 공격했다. 하지만 저항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근중심주의는 사회에서의 급여의 평등성, 생물학적 재생산, 부성, 교육, 정치적 행동, 글쓰기, 문체, 의복, 일반적 상징들에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힘은 프랑스의 원동력이다. 의견과 의견이 만나 대화를 나누며 충돌하는 논쟁 자체가 영원히 회자될 프랑스의 지성이다. 그리고 지금 프랑스는 다시 충돌을 일으켜 다음 페이지를 이어나갈 지성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