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연예인 싫어한다더니, 꼭 아이돌 같은 애를 골랐네? 왜 아까는 잘 안 보였지? 요즘 많이 나오는 애들 중에서 누구 닮은 거 같은데, 안 그래?”
아닌 게 아니라 내 파트너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처럼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 생김새였다. 손바닥 하나만으로도 가려질 듯한 조그마한 얼굴, 빨간 입술을 돋보이게 만드는 새하얀 피부, 기다란 눈 사이로 드리워진 속 쌍꺼풀…….
이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담배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 둔 라이터를 집으려는데, 그가 재빠르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은색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댕겼다. 두 손으로 정중하게 라이터를 든 그의 모습은 상대방에 대한 각별한 예의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아랫것이니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말하는 손짓. 그것이 내 마음 한구석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 p.14
“언니. 언니는 꿈이, 뭐야?”
애써 넘긴 소주가 목구멍에서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마신 소주를 죄다 뱉어 놓아도 부족할 정도로 기가 막힌 질문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차 선배, 임 선배, 박 선배, 그리고 여령 언니까지 모두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꿈이 무엇이냐니. 서울도 아닌 인천의 2년제 대학 야간반에 재수까지 해서 겨우 들어온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니.
나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여령 언니를 바라보았다. 여령 언니는 코를 너무 높게 세우는 바람에 성형한 티가 딱 난다는 게 좀 흠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만큼 예쁘게 생겼다. 168센티미터의 큰 키에 늘씬한 몸매, 길고 부드러운 머리칼까지 지닌 여령 언니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괜찮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가장 큰 꿈이라는 말을 종종 내뱉었다. 다만 그 ‘괜찮은 남자’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도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인데 결혼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보면 그 기준이 외모만은 아닌 게 분명할 따름이었다. 그런 여령 언니를 보고 있자니 2년 뒤의 내 모습이 더욱더 그려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수도권의 별 볼일 없는 2년제 야간대학조차 겨우 다니고 있는 나에게 어떠한 꿈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대학을 함께 다니고 있는 우리들 중에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하다못해 꽤 이름 있는 중소기업에만 취직해도 옳다꾸나, 개천에서 용 났네, 잔치라도 열어 줄 태세였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미주는 꿈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었다. --- pp.73-75
그렇게 매일 돈 들여, 공들여 치장하고 관리를 해도 막상 룸에 나오면 초이스가 되는 건 언제나 에이스들뿐이야. (……) 그런데 에이스들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만 있어도 여자들은 무조건 만족하는 거야. 옆에 앉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두들 침 질질 흘리며 행복해 죽으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는 아무리 돈 들이고 노력해도 결국에는 이 모양 이 꼴이고, 에이스들은 그저 가만히만 있어도 환영받는 세상이지. (……)
뭘 해도 안 되는 신세, 애초부터 글러 먹은 신세. 그래, 늘 그랬다. 공부를 비롯해 매사에 의욕이 없던 나는 일찌감치 문제아로 낙인찍혀 있었다.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만 가득하니 늘상 지각이었고, 수업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딴전만 부렸다. 당연히 교실 밖으로 내쫓기거나 교무실로 불려 가는 일들이 다반사였고, 선생들은 나에게 네가 학생이냐, 정신이 있는 거냐, 살아만 있다고 다 사람인 줄 아냐, 너 같은 애를 인간쓰레기라고 하는 거다, 등등의 말들을 쏟아 냈다. 그럴 때마다 뺨이나 머리를 맞는 등의 모욕적인 체벌을 받는 건 차라리 나았다. 혼내는 체하며 귓불이나 목덜미를 은근슬쩍 더듬는 선생들도 많았고, 상담실로 불러내 서슴없이 몸을 만지거나 성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선생들도 있었다. 학생도 사람도 아닌, 그저 날라리일 뿐인 나에게 그 모든 차별과 무시와 폭력은 너무도 합당한 일인 양 가해졌다. --- pp.103-106
나는 이 모든 게 다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섹스 한번 나눈 게 전부인, 나보다 나이도 어린, 고작 호스트바 선수나 뛰는 가벼운 남자애 한번 만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제리도, 제리와 만나는 일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야말로 이 아무것도 아닌 아이와의 만남에 나는 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것이 가장 이해되지 않았다. --- p.192
“이제는 정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어. 이곳을 벗어나 대학에 가고…… 아니면 연예인이 되어 엄청난 돈을 벌게 된다 해도 나는 어차피 이 바닥인 거야.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는, 모두에게서 따돌림당하는 이 바닥 삶을 계속 살게 될 거라고. 누나, 나는…… 죽어야만, 죽어 버려야지만 이 바닥의 삶이 끝날 것 같아.”
죽으면, 죽어 버리면 정말로 모든 게 끝이 날까. 언제나 나를 따돌리고 억누르는 이 지긋지긋한 세계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되는 걸까.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이지 죽어 버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죽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구질구질한 삶만 좀 끝낼 수 있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하겠어. 그런데 내가 진짜로 무서운 건, 죽어서도 이대로일까 봐, 죽어서까지도 늘 이따위 신세일까 봐, 또다시 이 바닥으로만 떨어질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죽어서도 결코 변하지 않을 이 바닥 인생을 생각하면, 도무지 죽을 수조차 없게 돼 버려.”
결국, 죽음을 통해 삶으로부터 도망친다 한들 마찬가지라는 얘기일까. 그러고 보면 현실은 어느 곳으로도, 어떤 식으로도 벗어나지지 않았다. 그러니 죽음으로 이 삶에서 도망친다 한들 마찬가지가 아닐 리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해야 이곳을 벗어나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더 이상은 도망칠 곳도 없는데, 주저앉을 바닥도 없는데.
마주 앉은 제리는 고개를 한껏 떨어뜨리더니 눈물방울을 툭 쏟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에이스가 되지 못하고, 에이스가 되지 못하므로 이곳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제리……. 나는 무겁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끌어안고 싶었다. 오래, 그리고 더 깊이, 있는 힘을 다해 안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괄약근에 힘을 주고 다리를 한껏 오므려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 안에 있기를, 그를 잡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음부를 꽉 조여 나갔다.
--- p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