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적 관점에서 빈곤은 ‘분배의 문제’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인문학의 관점에서 빈곤은 분배의 문제이기 이전에 ‘관계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관계란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관계의 산물이지요. 사람과 사람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입니다. 빈곤 문제를 인문학적 관점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 pp.43~44
어쩌다 보니 순탄치 못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교 과정은 야학에서 마쳐야 했고, 독학해서 대학에 진학했으며, 대학 시절엔 야학 교사 활동과 혼란한 시국에 휩쓸려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의 제적 끝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본격적인 고난의 시작이었지요.
대학 졸업장 없이 사회에 나선다는 건 무모한 일입니다. 아예 들어가지 않았으면 모를까, 들어가서 그냥 나왔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수시로 무시와 편견의 과녁이 되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남몰래 시름을 달래야 했지요.
그때 매달린 게 책이었습니다. 조건은 채우지 못했지만 내용이라도 알차게 다질 요량에서였어요. 활자로 된 모든 것을 읽자 했습니다. 신문, 잡지는 물론이고 단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도서관을 찾았고, 약속은 주로 서점으로 잡았으며, 수입이 주나 느나 꾸준히 책을 구매했습니다.
어느새 집은 책으로 벽을 쳤고, 제 머릿속은 나름 텅 빈 느낌이나마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선 ‘도서 평론가’라는 직함을 주었고, 신춘문예 당선 후엔 ‘작가’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특히 노숙인 대상 인문학 강좌에 참여한 뒤론 가당찮게도 ‘교수’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지요.
책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책을 읽어왔고 읽고 있기에 유지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늘 지적 허기에 시달리지만 그리 걱정하진 않습니다.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었으며, 내일도 읽을 것이니까요. ‘나는 읽는다, 고로 산다!’
--- pp.226~227
이모의 죽음은 제게 충격이자 해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끝없는 반항과 방황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이모였지요. 특히 사춘기 적, 이모의 주사와 불결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그런 이모에게 반항하기 위해 나는 부러 귀가 시간을 늦췄고, 동네형들과 어울려 밤을 지새우며 화투놀이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
이모의 죽음은 어쩌면 내 문학의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게 아쉽고 서러워서 나는 소년 율겐처럼 이모의 주검 옆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내 문학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설핏 무섭기도 했고 이상한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종내 향 냄새와 포르말린 냄새 옆에서 밤을 지새웠어요.
이모를 강에 뿌리고 돌아온 날 폭음했습니다. 술에 취해 다시 강변에 섰을 때 그제야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모의 말년의 삶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모의 술타령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대체 이모는 내게 무엇이었던 걸까요?
아직도 그걸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날 밤 어렴풋이나마 이모를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기나긴 세월이 미안하고 죄스럽고 부끄러워서 소리 없이 흐른 눈물을 강물에 보태고 또 보탰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는 말을 되뇌며 내 문학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 pp.244~245
글쓰기는 철저히 실천의 문제이며 오로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자기만의 느낌과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는 진입 장벽이 꽤 높은 작업이기도 합니다. 기초를 다져야 하고 기본적인 기교도 길러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나름의 문체 감각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오로지 쓰고 또 쓰고, 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SNS는 훌륭한 글쓰기 연습의 장입니다. 일단 공개된 곳에 글을 올리는 일은 많은 것을 신경 쓰게 합니다. 흉보지는 않을까, 엉뚱한 반응에 직면하지는 않을까. 그런 것을 신경 쓰면서 지속적으로 글을 쓰다 보면 서서히 내 글의 완성도에 대해 스스로 진단하게 되고 그런 과정이 곧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 pp.258~259
저질러야 합니다. 저지르고 나서 후회할 일이면 후회하고 아플 일이면 아프고 즐길 일이면 즐기는 겁니다. 해보지도 않고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안 되느니 차라리 저지르는 무대책한이 되라는 겁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그 말은 저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 세계관이었고 문학관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p.298
부끄러움을 이겨내는 글쓰기
또 하나의 부끄러움을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이번 책 역시 수준을 말하기 힘들 정도로 부끄럽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부끄러움이야말로 저를 키우는 밑거름이자 자양분입니다. 저라는 사람은 어쩌면 부끄러움을 먹고 사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부끄러움의 다른 말은 결핍’입니다. 극복하지 못한 결핍과 그 결핍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게 바로 저이고 저의 책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가 뭘까요.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낯 두꺼운 사람. 저의 경우는 둘 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야 비로소 설명이 가능합니다. 저는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부끄러운 그 상태로 세상에 나서는 방식으로 부끄러움을 이겨내려 하는 사람인 겁니다.
지난 1년 간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묶었습니다. 300여 편의 글 중에서 100여 편을 추려냈습니다. 성실하게 썼다는 것 말고는 도시 미덕을 찾을 수 없는 글들입니다. 그럼에도 책을 내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잘 쓴 글, 좋은 글은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성실하게 썼다는 것입니다. 개별 글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성실한 삶의 자세와 그의 꾸준한 기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글쓰기의 방식과 기교를 알려주는 책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의 자세, 성실한 글쓰기의 미덕을 보여주는 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글쓰기의 기교가 아니라 글쓰기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의 제목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는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글로, 강의로 자주 활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문장의 유래를 소개합니다.
언젠가 대학 후배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매일 글을 올리세요, 별로 잘 쓰는 것 같지도 않던데.” 딱히 반발할 수가 없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후배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올릴 땐 매양 잘 썼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다음날 보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거다. 삭제해 버릴 수도 없는 게 이미 ‘좋아요’나 ‘댓글’을 달아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부끄러운 글을 밑으로 내리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게 바로 매일같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된 셈이다.”
글의 완성도가 높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썼고, 오늘도 썼으며, 내일도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족한 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 글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부끄러움은 감추면 감출수록 자라나지만 그대로 드러내놓으면 어느새 그 자리에 자신감이 자라납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SNS시대의 글쓰기는 소통을 위한 글쓰기입니다. 소통의 요체는 진심과 진실입니다. 실력을 뽐내거나 자기 자랑만 늘어놓아서는 진실한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쓴 글이어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진실한 소통을 위한 글쓰기,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한 글쓰기의 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수시로 밀려드는 외부 강의를 소화해야 했습니다. 매일 글을 썼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물론 술도 매일 마시면서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 싫어도 도리 없이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스스로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런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처방은, 인문학 강의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 안 가리고 전국으로 돌아다녔습니다. 강사비, 대상, 기관 안 가리고 부르면 달려갔습니다. 강의를 위해선 글쓰기와 책 읽기는 기본으로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게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모든 걸 제대로 해낸다는 게 버거웠습니다. 그럼에도 용케 견디고 버텼습니다. 늘 피곤했지만 늘 무엇을 쓰고 무엇을 읽을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체력과 뇌의 용량을 초과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밀어붙였습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다 보니 웬만한 약속은 뒤로 미루거나 사양해야 했습니다. 지척인 서울 나들이도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줄였습니다. 좋아하는 후배들을 못 만나고 산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고 도를 닦았던 건 아닙니다. 여전히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꾸준히 영화를 보러 다녔고, 서점 순례를 이어갔습니다. 주로 딸아이들과 함께했습니다. 그사이 두 권의 책이 나왔고, 배가 나왔고, 많은 책을 읽었고, 빚이 다소 줄었습니다.
문득, 공허합니다. 이젠 시간이 나도 나를 만나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서글픕니다.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중 상당수를 실망시켰고, 나 역시 그중 상당수에게 실망했습니다.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견뎌야 했습니다. 고군분투의 시간이었습니다.
새삼 깨닫습니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 있어야 사람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나는 언제나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될까요. 섬처럼 떠도는 외로운 삶을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