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아 ● 서울생활 5년차 대구시민입니다
자취는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자취를 하기 위한 터전이 되는 동네는 특별하지 않아도 추억이 쌓이는 동네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취를 꿈꾸고 있다면 혹은 자취를 하며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있다면 ‘봉천동’에 자리를 잡아보 는 것은 어떨까요?
봉천동은 점점 변화하며, 또 더 나은 동네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운 빌라가 들어서는 모습에서 자취생들의 세대교체를 느낄 수도 있지요. 이제 더 나은 환경에 서 새로운 자취의 시대에 뛰어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서울생활 5년차 대구시민이 바라본 봉천동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으로의 터전, 어제 와 오늘이 함께하고 있는 봉천동에서 ‘서울지앵’으로 변신해보세요.--- p.40~41
이종현 ● 어쩌면 마지막 혜화동 이야기
오지랖 같지만 문득 혜화동에게 꼭 맞는 옷을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혜화동의 풍경, 아날로그와 청춘이 공존하던 분위기, 나와 혜화동이 공유하던 젊은 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알게 되고 공감해준다면, 혹시라도 변해가는 혜화동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를 위한 찬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로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추억하고, 변해버린 대학로에 적응하는 이야기들은 대학로에서 다시 연극을 시작한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다시는 현실에 지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속에 담대함을 쌓아 올려주리라 기대한다.
나는 꿈꾼다. 혜화동에 다시금 파전 냄새가 풍겨나기를. 내 공연이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를. 젊은 연극인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소극장이 빼곡하게 들어차기를. 마로니에의 한적한 여유로움과 낙산공원의 천사벽화가 다시 생겨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내 글이, 사람들의 관심이 혜화동에게 옛 모습을 되찾아줄 거라 믿는다.--- p.53~54
차오름 ● 신림동 고시촌, 청춘애가(靑春哀歌)
길에서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우는 청춘을 보아도 아무도 놀라지 않던 곳. 2차 스터디 모임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전화번호와 나이를 묻는 것보다 이름을 묻는 것이 더 큰 실례가 되는 곳이었다. 600년 유교의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그래도 호형호제는 해야 했기에 친숙해지면 수줍게 나이를 물었다. 그럼에도 끝내 이름은 묻지 않았다. 당신이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게 하지는 않겠다는 듯 우리는 그렇게 이름은 가리고 다녔다. 습관적으로 책에 이름을 쓰던 것도 멈췄다. 이니셜을 쓰다 나중에는 점 두 개를 찍어 내 책이라고 표시했다.
2013년 국민권익위에 항의한 누군가의 용기(?) 덕분에 더 이상 합격자 명단에 이름은 없고 오직 수험번호만 공개된다. 이후 고시촌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직도 이름을 묻지 않는 것이 그곳만의 매너일까. 신림동에서 놀라웠던 또 다른 풍경은 길에서 우는 사람을 봐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모른 체해주었다. 합격자 발표날 새벽, 청춘들은 짐승처럼 울었다. 그날만큼은 새벽녘의 울음소리에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비슷한 청춘을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p.91~92
안선정 ●도봉구 24년차 주민의 추억 여행
어려서는 뭐든 같이하던 ‘우리’였는데….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심지어 몇 년 전부터는 여동생과 한 방을 사용하는데도 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달라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고, 바쁜 일상 때문에 밥 한 끼 같이 먹기도 힘든 요즘입니다. 아침에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직장, 학교로 헐레벌떡 뛰어나가기에 정신없고 밤에는 공부, 일, 약속 등의 스케줄을 마치고 늦은 시각 집에 돌아와 씻고 잠들기 바쁩니다.
그리고 얼마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탁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습니다. “선정아, 신방학 초등학교 폐교될 수도 있대!”
‘아니, 내가 나온 신방학 초등학교가 없어질 수도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도 엄마는 시간이 나면 마을버스를 타고 방학동으로 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곤 합니다. 아줌마들 사이에서 ‘예전에 비해 동네에 아이들이 많이 줄었다’, ‘우리 그때 그렇게 모여 살 때 참 재미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애들이 다니던 학교도 입학생이 많이 줄어 없어질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 p.112~113
엄사사 ● 24시 카페에서 유학생의 하루
중국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미리 준비해야 하는 편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어떤 중학교에 보낼지 초등학교 때부터 고민하고 준비합니다. 아이들도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미래 지향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 좋은 일이지만 가끔 곤혹스러운 때도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더 힘을 내야 하지? 하고….
당신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믿나요? 아니면 종종 의심의 질문을 하나요?
2014년 7월은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는 취직하거나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중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신호등에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다 문득 옛 생각이 났습니다. 신호등 불빛이 바뀌면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분주히 바뀝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요? 한국은 내가 살던 중국에 비하면 동네 곳곳에 카페가 넘칩니다. 나는 카페 하나를 선택해 들어가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에 더욱 빠져들었습니다.--- p.142~143
최하경 ● 홍대앞 20년 추억의 공간들
경의선 숲길 이야기를 하려니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사는 곳이 연남동이었다는 게 떠오릅니다. 그 친구집으로 가려면 홍대 철길을 지나야 했습니다. 바로 그 철길에 몇 해 전에 공항철도가 들어오고 위쪽이 정리되어 경의선 책거리로 재탄생했습니다. 젊은이들로 가득한 서울 홍대입구에 독서문화가 숨 쉬는 새로운 공간이 들어섰습니다. 옛 경의선이 지나가던 철길에 책이라는 콘셉트를 합친 건데 이곳에는 열차 모양의 부스에서 아동, 예술, 문학 등 9개 테마로 나눠진 칸에서는 다양한 책들을 전시·판매하고 있습니다.
홍대앞에 왜 출판일까 묻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홍대 하면 먼저 미술, 인디음악, 클럽문화가 떠오르니까요. 아닙니다. 홍대앞과 책문화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홍대앞에 있는 출판사 개수가 가장 많지요. 90년대 중반부터 내가 다녔던 출판사는 모두 홍대에 있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홍대앞 출판사에 다니고 있으니까요. 20년 이상의 직장생활 속에서 다른 지역으로 다닌 적도 있지만 대다수 출판사가 이곳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늘 홍대앞으로 돌아왔습니다. 홍대앞에 책문화공간이 있고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지 현재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p.179~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