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모르는 운명의 개척자
김만덕은 제주의 양갓집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관기에게 의탁해 살았던 탓에 본의 아니게 관기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스무 살 무렵 스스로 관아에 찾아가 양민 신분을 회복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녀가 여타의 기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당시 기녀들이 기적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첩의 길을 택하는 것이었다. 한 남성을 선택하여 가부장제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덕은 논리적인 언변과 당당함으로 본래의 신분을 되찾았고, 곧이어 상업의 세계에 뛰어들어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삶을 시작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꽃으로 피기보다는 새가 되어 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신분을 회복한 만덕은 행상으로 돈을 모아 포구에 객주를 차렸다. 조선시대에도 여상인이 적지 않았으나 대개 소소한 행상을 하는 수준이었지, 만덕처럼 여러 남성들을 거느리며 큰 규모의 객주를 운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만덕은 객주의 운영에만 매진하면서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노비나 기녀가 아닌 여성이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덕이 독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주체적인 삶에 대한 자각과 사회제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뜻이다.
훗날 제주에 기근이 닥쳤을 때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내놓은 것이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한양으로 가서 임금을 만나고 금강산에 오르고 싶다고 한 것에서도 만덕이 얼마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물이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결국 그녀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수많은 선비들이 흠모하는 대상이 되었으니, 시대와 불화하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운명을 개척해간 조선 최고의 여장부였다고 할 만하다.
모험과 도전에 능한 혁신적 기업가
만덕은 조선 후기의 시대 변화에 명민하게 반응한 능력 있는 사업가였다. 그녀가 살았던 영ㆍ정조 시대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던 시기로, 선박을 통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인 포구가 새로운 상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게다가 그 주변에는 장시가 개설되어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규모의 상업 도시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하나의 상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 만덕은 운송 체계에 기초한 유통망이 상업 발전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객주였다. 객주는 여관의 구실도 했지만,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중간상의 역할도 했다. 만덕은 객주를 중심으로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에게 육지의 옷감과 장신구, 화장품 등을 팔고, 제주의 특산물인 미역, 전복, 표고, 양태, 말총, 녹용, 귤 등을 육지에 팔아 시세차익을 남겼다. 그녀는 중간상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선박을 소유해 육지와 직거래를 실시했으며, 수공업자나 목축민 등과 직접 계약을 맺어 물건을 주문생산하는 '선대제'의 방식을 도입하여 거래의 규모를 키워갔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공물 진상선 경합이라는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듯, 관아의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만덕은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과 과감한 투자, 모험 정신으로 변방이라는 지리적 한계와 여성에게 강요된 시대적 굴레를 극복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최근 뛰어난 사업적 수완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 기업가들이 사회 전면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200여 년 전에 그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만덕의 삶은 오늘날 마땅히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화폐인물 1호로 만덕이 거론되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나눔을 실천한 선구적 자선가
만덕은 제주에 최악의 기근이 닥친 1795년 전 재산을 관아에 기부했다. 그때는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를 싣고 오던 배들이 침몰하면서, 3년 전부터 계속된 기근이 최악의 상황을 맞은 시기였다. 당시 경제력을 지닌 몇몇 양반층 인사들이 구휼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만덕처럼 전 재산을 내놓은 경우는 없었다. 이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기부'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이전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일이다. 평생에 걸쳐 모은 재산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놓은 만덕의 모습에서, 일찍이 사회 환원의 의미를 깨달은 선구자의 면모와 마침내 꿈을 이룬 사람이 이른 무상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 "이제 곳간을 열어라!"라고 외치던 만덕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재산을 더 많이 축적하여 후손에게까지 물려주려고 하는 우리와 달리, 만덕은 상인이자 생활인의 입장에서 분배의 문제를 가장 먼저 고민하고 실천한 선구자였다. 만덕의 기부는 오늘날로 치자면 거대 기업의 경영자가 그 기업이 내는 이윤 전부를 사회에 환원한 것이나 다름없다.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 결정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 만큼, 만덕의 뚜렷한 주관과 결단력은 빛을 발한다. 그동안 역사 서술에서 소외되었던 만덕의 삶을 복원하는 일은 결국 오늘날 우리 곁의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는 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를 읽는 한 가지 이유를 분명히 제시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