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볼 때 나는 안정적인 회사에서 적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잘 살아가는 서울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홍대 부근 어느 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앞에 두고 똑같은 대사를 외치고 있었다.
“선배, 출근하기 싫어서 정말 미치겠어요.”
반복되는 생활 속에 그냥저냥 ‘살아지게’ 되리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 시간을 견디면 직급은 올라가고 연봉도 더 많아지겠지만 그렇게 40대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30대의 나에게 미안하지 않겠느냐고, 후회는 없겠느냐고 스스로 물었을 때도 내 답은 분명했다.
--- p.15-16
직장에 사표를 내고 무작정 내려온 제주에서 처음 두 달 동안은 대평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냈다. 하지만 장기로 묵으면(이런 손님은 ‘장기수’로 불린다) 서울에서의 한 달 월세와 맞먹는 돈이 든다.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어떤 집이 좋을까? 월급도 끊겼고 모아 놓은 돈도 많지 않았다. 내가 가진 ‘총알’을 따져본 뒤 마음속으로 정한 금액은 연세 100만~300만 원.
문제는 연세로 구할 수 있는 집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연세는 계약금이 적다 보니 현지 부동산에서도 거래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침 연말에 계약이 끝나는 집이 한 곳 있다는 정보가 게스트하우스 주인 언니로부터 입수됐다.
--- p.21
운동화를 빨다가 울어본 적이 있는지? 빈집에 돌아와서 토사를 치우느라 엉망이 된 신발을 빨다 말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제주에서 또 하나의 섬이었다.
제주에서 살겠다고 다짐할 때 이미 예상했던 쓸쓸함이다. 하지만 막상 대면하니, 견디고 받아들이는 일이 버겁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주에 사는 건 무척 좋지만 홀로 눈물을 훔치는 외로움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 p.43
예상은 빗나갔다. 할머니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오셨다. 손에 한라봉을 들고, 떡을 들고.
“우리 아들 언제 만날 거야?”
“아, 할머니, 그게요…….”
정작 본인들은 제대로 얼굴 한번 마주하지도 못했는데 할머니의 아들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는 꾸준하고 성실하다. 결혼 생각이 아직 없으니 불발로 끝난다 해도 할머니의 좋은 말벗으로는 남고 싶은데, 어찌 해야 좋을까. 쾅쾅쾅, 오늘도 할머니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기다리는 밤이다.
--- p.74
제주에서 집을 구하려면 무턱대고 빈집부터 보러 다니지 말고 어느 지역에 살고 싶은지, 어느 마을이 낫겠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단기간이라도 좋으니 그곳에 살면서 마을 어르신들과 안면을 트는 것도 좋다.
괜찮아 보이는 빈집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어떤 이웃이 사는지, 마을의 인심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동네 어르신에게 부탁해 며칠 밭일이라도 나가보길 권한다. ‘합격점’을 받는다면 마을에 숨겨진 빈집 목록이 줄줄이 나올지 모른다(주변에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 더욱이 마을 사정에 밝은 어르신들이 문제 있는 집을 알아서 걸러줄 것이다.
--- p.132
모두들 저마다 인생 산수를 하며 살 것이다. 나는 제주에서의 좋은 환경과 마음의 여유를 더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안정된 직장과 수입, 편리한 생활을 뺐다. 물론 어느 것이 덧셈이고 어느 것이 뺄셈이 되는지는 지극히 개인의 선택이다.
그렇다 보니 제주에 살러 오겠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특별히 들려줄 말이 뭐가 있겠나. 각자 자기 인생의 산수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와 같은 산수를 해서 제주도에 내려온다 해도 모든 것이 덧셈이 되지는 않는다. 1년 살 집 한 칸 구하는 일도 쉽지 않고 외로움 같은 지독한 복병이 늘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 p.135
제주도에 아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연세로 내놓는 집이 어디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운 좋게 집을 구한다고 해도 육지와는 여러 가지로 다른 제주도의 생활에 지쳐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 결국 몇 달이 되었든 우선 살아보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럼 어디서 살아보냐고?
“나하고 삽시다!”
--- p.137
“언니, 요강을 사야겠어요.”
“언니, 여기 집게벌레 있어요.”
농가 주택을 임대해 몇 주에 걸쳐 공사를 마치고 방 네 칸짜리 집이 완성됐을 무렵, 여자 1호 유라가 들어왔다. 그녀를 기다린 것은 언제든 집을 나서면 만날 수 있는 제주의 막힘없는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농가 주택이라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 불편함, 집 뒤편 밭에서 날아드는 온갖 벌레들, 버스가 많지 않고 일찍 끊겨서 외출할 때마다 신경을 더 써야 하는 일 등등. 이 모든 것은 도시에서는 겪어보지 않은 생경한 불편함이다.
--- p.149
겨울 추위를 대비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정작 우리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마을 이웃들이다. 대강 수습해놓았던 무너진 대문은 근처에서 공방을 하는 제주 토박이 어른이 자재비만 받고 멋지게 새로 달아주셨다. 대문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으니 왠지 덜 추운 느낌이다. 이웃 어르신들이 갖다주신 달콤한 감귤도 훈훈함을 더한다.
--- p.182
여자 3호 경희 언니의 어머니도 셰어하우스에 오셨다. 마을의 한 식당에서 어머니가 사주신 근고기를 배불리 먹은 다음 날, 경희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미안한데…… 나 내일 서울 올라가.”
경희 언니가 우리 집에 산 지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언니는 우리 집에서 반년을 살 예정이었다. 우리 집이 마음에 들어서 집 앞 빈 창고에 국수집을 차릴 계획으로 부푼 꿈을 키우던 언니였다. 마침 주인집 할아버지와 5년 장기계약을 협의하던 중이었는데, 엄마에게 그 계획을 털어놓자마자 눈물로 호소를 하신 모양이었다. 황망히 짐을 싸는 언니를 떠나보내고 나는 며칠 헛헛한 마음에 시달렸다.
--- p.174
“제주도 인맥은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연결돼. 그러니까 뭐든 조심해야 해. 사람들 체면을 세워주고 거기서 실리를 찾아야 해.”
육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눈치, 밀당(밀고 당기기), 체면치레, 협상 등 각종 인간관계론을 다 가져다가 잔뜩 ‘썰’을 풀고 있는 나. 답답해서 복장 터지는 내게 그녀는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는 내가 못 보는 걸 보는구나. 어쨌든 그냥 천천히, 진심을 갖고 하면 될 거라 믿어요. 난 그것밖에는 가진 게 없으니까.”
--- p.185-186
한라산소주를 앞에 두고 한창 달리던 어느 날 밤, 신원 오빠가 불쑥 제안을 했다.
“밴드 하자.”
마이크라곤 노래방에서밖에 잡아본 적 없는 나랑 밴드를? 심지어 다룰 줄 아는 악기도 하나 없는데? 아, 그렇지만 밴드! 밴드라니! 이 얼마나 멋진 단어란 말인가. 노래방에서 노래 좀 한다는 소리는 들어봤기에 그만 “오케이”를 외쳐버렸다.
--- p.206
제주의 가을이 다시 왔구나, 느끼며 차로 달리다 보니 새삼 처음 제주의 하늘과 바다에 푹 빠졌던 그 가을이 떠오른다. 제주는 이제 내가 처음 생각했던 그 제주가 아님을 안다. 가끔씩 팍팍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말없이 위로가 되어주는 것은 처음 발을 들인 그때나 지금이나 제주의 하늘과 바다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제주에서의 하루를 이어간다.
--- p.24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