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한국을 얼마만큼이나 배웠느냐 하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등소평의 참모들이 ‘우리는 철광석 자원도 많고 기술력도 있으니, 한국 포항 제철과 같은 종합 제철을 건설합시다.’ 하니까, 등소평 왈, ‘우리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 했다는 것이다.
중국이 한국을 제대로 배우기 전, ‘경제 개발과 수출 확대’란 목표를 내세웠으면서도 물품 수입 관세, 18% 부과 원칙을 고수했고, 하물며 수출용 원자재에 대하여도 물품세, 비과세 또는 환급 정책을 세울 줄 몰랐었다.
이에 ‘웨이하이’, ‘샤먼’ 등 주요 항구에서는 관세 포탈, 즉 밀수가 성행했는데, 홍콩에서 심천으로 들어오는 광동성의 세관에서는 간이 검사만 하고, 컨테이너 당 최소 금액을 형식적으로 부과하고 신속히 통관시킴으로써 기업 경제 활동에 최대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에 중앙 정부에서는 위법 행위라고 경고하고 중지 명령을 내렸으나 초지일관하였다. 그래서 중앙 정부는 군을 파견하여 엄단하겠다 했는데 성 서기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성 군으로 항전하겠다고 대응하였었다.
결국은 중앙 정부가 수출용 원자재 수입 관세 환급제를 채택하여 합리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부터 개발 붐이 일어나 80년대 말까지 개발 의욕을 불태웠고, 이 기간에 애국하는 숨은 일꾼들이 많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서울 올림픽 이후 1990년대부터 한국식의 개발붐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2010년 대까지 20년 동안에 놀라운 성과를 내었는바, 이 기간에 광동성 서기장과 같은 목숨을 건 애국 행정가들이 있었다.
중국은 개혁 개발의 바람이 제대로 일기 시작하자, 집행부를 이공계 대졸 출신으로 무장하여 수리적이고 논리적인 행정 관리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강택민은 상해 교통대학 전기공학과 출신, 후계인 ‘후진타오’는 청화대학의 수력전기 공학과, 그리고 이어서 ‘시진핑’은 청화대학의 기계공학과/법과 출신이다. 현재 일곱 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비공과계 출신은 한 사람, 국무원 총리, ‘리커창’으로 북경대학에서 법학과를 마친 후,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경제 정책통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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