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실조라고요? 보아하니 지금 이 자리엔 나의 영양실조를 운운하기 전에 자신의 만성 비만을 먼저 걱정해야 할 사람이 최소한 두 분은 계신 듯한데요?”
엄마가 화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공기를 가르는 화살처럼 매서운 눈초리였다.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화살은 내게 부딪혔다가 이내 튕겨 나갔다.
“내가 맥도널드에서 배 터지게 먹어 대는 애가 아니라서 심각하다는 건가요? 나는 나름대로 영양 섭취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요. 좋아요, 엄마! 엄마가 원한다면 저녁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초콜릿을 한입 가득 집어넣을게요. 하지만 나를 이렇게 병원에 처박아 두지는 말아 주세요.”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가며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의 말이 자신의 지방 덩어리를 지켜 내려는 노력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pp.42~43
어떻게 하다가 이 ‘달안개’라는 카페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중요치 않았다. 카페를 발견한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번쩍 빛을 발했다. 마르고 싶은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곳은 거식증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카페가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한탄하는 곳도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거식증에서 벗어났다.”라는 식의 체험담을 늘어놓지도, 신경정신과 의사가 상투적인 조언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명확한 말과 명확한 규칙. 이것이야말로 나의 의사소통 모델과 딱 맞아떨어졌다. ---pp.73~74
나는 바로 직전에 와 있었다. 똑바로 걸을 수 있게 되기 바로 직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게 되기 바로 직전, 거울 속 내 모습을 견딜 수 있게 되기 바로 직전, 내가 되기 바로 직전…….
또다시 살덩이 속에서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아 왔는데……, 나 자신이 얼마나 싫었는데……. 옷을 살 때마다 탈의실에서 거울을 등진 채 입어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옷조차 사기 싫었다. 작년 여름휴가 때 찍은 사진들을 보고 나서였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엄마는 여름휴가 때 찍은 사진을 가져와서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 순간, 살찐 돼지 한 마리가 웃고 있었다. 키가 큰 편이어서 눈에 더욱 잘 띄었다. 마치 발이 달린 광고탑 같았다.
나는 다이어트를 시도했다. 시도하고 실패, 시도하고 실패하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난 다음부터는 식단 조절을 포기하고, 가능한 한 적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이제 목표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럴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pp.162~162
“넬레, 네가 바로 그 호랑이 눈이야. 네가 바로 그 춤꾼이야. 다음은 네 차례야. 여기서 누군가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해? 네 눈을 한번 바라봐. 네가 울부짖어야 할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 자신이라고. 아직 살아 있을 때 그걸 깨달아야 해.”
“입 닥쳐! 난 로베르트 오빠한테 가야 해.”
“아니, 넌 너한테 가야 돼. 너 자신한테 가야 한다고! 혼수상태에 빠진 건 네 오빠가 아니야. 거식증에 걸린 춤꾼이 이 세상에 한둘이겠어? 그것이 네 오빠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고!”
(중략)
“먹을 수 없어.”
“먹으려 하지 않는 거야.”
라르스는 문 으로 갔다.
“콤 말……, 콤 마……, 코마(‘콤 말’은 ‘이리 와.’라는 뜻이고 ‘코마’는 ‘혼수상태’라는 뜻으로, 음이 비슷한 말을 반복해 ‘먹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옮긴이).”
라르스는 천천히 그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 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넬레, 난 네 오빠가 괜찮을 거라고 확신해. 자, 이제 넬레를 위해 한 숟가락을 먹어. 그리고 네 오빠를 위해 한 숟가락을 먹는 거야.”
---pp.204~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