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윳빛 자태를 자랑하는 직사각형의 여수 시민회관 위로, 세로로 길게 드리운 현수막이 바람에 살랑살랑 펄럭인다. 바로 뒤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군산이 그 위용을 뽐내며 초록빛 신록으로 자르르 윤기가 난다. 짙푸른 산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일정한 템포로 펄럭이는 현수막의 몸짓이, 마치 지금 막 길을 건너는 재만에게 보내는 환영의 손짓 같다.
[2013년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 그랑프리 수상 기념, 지미 박 귀국 연주회]
장군산과 시민회관과 현수막이 삼박자를 이루며 재만의 눈길을 정겹게 끌어당긴다. 오늘은 무엇을 봐도 다 좋게만 보인다.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재만이 현수막에 적혀 있는 ‘지미 박’이라는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짚어가며 읽는 동안, 시민회관 안을 가득 메우던 박수소리가 그의 귓전에까지 밀려든다. 순간 재만의 이마에 새겨진 세월의 주름이 깊어지면서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다.
‘역시 그때 결정이 옳았던 거야. 암, 그렇고말고!’
재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핑 도는 눈물을 투박한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는다. 그의 손엔 바닷사람의 고된 일상이 오롯이 배어 있었다.
--- pp.16~16
시선이 집중되자 자신의 양복 차림새와 꽃다발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무안해진 재만이, 졸지에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그 순간 못 보던 남자아이 하나가 이상하게 생긴 나무상자를 가슴에 꼭 품은 채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재만과 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도 없이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재만은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무슨 이유에선지 재만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곤 요한 신부와 아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앤 누구야? 얘, 넌 누구니?”
“재만이……. 이 아이가…… 자네…….”
곁에 있던 요한 신부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남자아이가 재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이은재! 우리 엄마가 이은재예요. 저는 지미고요.”
--- pp.33~34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공장을 다니며 기타에 푹 빠져 있던 그때가 가장 빛나던 청춘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기타 칠 생각만 하면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공장장이 거액의 공금을 횡령하는 바람에 회사는 부도가 났고, 재만은 석 달 치 월급도 받지 못한 채 백수가 되어야 했다. 재만은 한편으론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까지 신발 공장에서 이대로 썩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2, 3년 열심히 일해서 모아놓은 돈도 좀 있겠다, 슬슬 다른 일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 사이 기타 실력도 부쩍 늘어서 일요일마다 드나들던 음악 감상실에서 몇 번 연주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 종로와 명동에 이어 이태원 해방촌 근처의 술집들을 몇 곳 알아보러 다녔다. 한창 비틀즈와 팝송에 심취해 있던 터라, 미팔군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들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음악도 실컷 듣고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갈고 닦은 기타 실력도 뽐내고 싶었던 것이다. 가게에서 먹고 자며 청소를 한다는 조건으로 [블루 문]이라는 술집에 취직하게 되었다.
처음 한 달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종업원 중 나이가 제일 어려서 다행히 웨이터 형들도 막냇동생처럼 잘해 주었다.
라디오에서만 듣던 노래를 이곳에서는 기타 연주에 맞춰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화려한 라이브 무대는 아니었지만, 술 취한 미군들 사이로 맥주를 나르며 듣던 그 감미로운 기타 소리와 노래들을 재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음악은 고된 현실을 버텨 나가는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었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 pp.82~83
저녁 준비로 바쁜 재만이 부엌에서 듬성듬성 회를 썰고 있다.
쪼르르 달려온 지미가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긴 회를 보고 “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초장에 찍은 회 몇 점을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는 지미의 모습을 보고 재만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은재를 잃었다는 슬픔이 조금씩 덜어질수록 지미에게 자신의 마음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요즘 와서 부쩍 친근하게 굴면서 가끔 어리광을 피우기도 한다. 처음 봤을 때는 어린 나이에 그것도 핏줄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 험한 일을 겪어 그런지, 애늙은이 같던 놈이었는데…….
--- p.128
문득 어린 시절에 보던 밤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바다에서 사고를 당한 부모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바라보던 바로 그 밤바다가 보고 싶었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휩싸여 바위 위를 스치는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던 금오도의 밤바다. 그 밤바다의 적막감과 쓸쓸함이 재만에게는 오히려 위안이 되고 약이 되곤 했었다. 바다에서라면 재만도 얼마든지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다. 바다 앞에서라면 자신이 강해져야 할 이유가 한 개도 없었다. 한없이 약한 존재가 되어 바다 위를 표류한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약하고 강한 것과는 상관없이, 바다는 언제나 그 위대한 한결같은 모습으로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 안아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비라도 오는 날이면 바다는 곧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조금만 삐끗해도 바다 위가 아닌 바다 아래로 침몰해 버리는.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봐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침몰을 재만은 꼭 바다에서 맞고 싶었다. 자신의 어머니요 아내요 딸이나 마찬가지였던 그 바다에서.
--- pp.166~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