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구대회에서 살아만 남으면 우리 노예들도 이 저주받은 곳에서 탈출할 수가 있어.”
“격구대회?”
“응. 나도 이번 격구대회에 지원을 하기로 했어. 일 년에 딱 한 번 열리는 대회인데 그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거기서 요행히 살아만 남으면 우리 노예들도 이 저주받은 곳에서 탈출을 할 수가 있거든.”
“뭐?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물론이야. 자원자들은 모두 세 번을 싸우게 되어있는데 그 중에 첫 관문만 통과해도 이 지옥 같은 공역장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이지. 어디 그뿐인가. 원하기만 하면 노군에 편입이 되기도 해. 저 견가와 우가 놈들처럼 말이야. 상급이 주어지는 셈이지. 그리고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면 소군장 밑에서 군사를 거느릴 수 있는 자리도 얻게 돼. 소군장 최양백이 놈도 그 과정을 거쳤거든.”
갑이는 군살이 박히고 생채기가 난 손을 들어 구릉 위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최양백을 가리켰다.
“저 최양백이가 맡은 직책을 소군장이라고 불러. 위로 올라갈수록 중군장, 대군장이라고 부르지. 저놈 최양백이가 아주 또 독종이야. 지금까지 격구대회에 참가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뛴 놈은 저놈이 유일하다고 들었어. 노예들의 우상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봐, 김준이. 자네도 나랑 같이 자원하지 않겠어? 아까 보니까 몸놀림이 꽤 날래던데.”
“나는 격구를 몰라.”
“나도 몰라. 말이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이지, 실은 피를 튀기고 싸우는 거야. 워낙 싸움이 치열해서 대부분 초반에 죽거나 병신이 되는데, 병신보다는 결국 목숨을 잃는 자들이 더 많아. 결국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야 하는 셈이지.”
“그렇게 무시무시한 대회에 자원을 한단 말이야?”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하면 원하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거든.”
“소원?”
“응. 저 양백이놈도 세 번째 관문에서 혼자 살아남은 덕분에 소군장이 될 수 있었어. 그때 그놈이 말한 소원이 바로 소군장 자리였거든.”---2장 추락한 신분, pp.100~101
“미련한 자들 같으니라고……. 백성이 먼저인가, 황실이 먼저인가? 백성 없는 국가가 어디 있으며, 백성 없는 황제가 어디 있는가? 지난 백여 년 동안 황실이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살핀 일이 있었던가? 누가 저 배고픈 백성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네 놈들은 그 소리들을 들어본 적들이 있는가?”
“…….”
최춘명과 이장용이 찔끔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가를 부른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시골로 들어가 밭을 갈 것이다. 알겠느냐? 죽고 사는 것은 너희들의 선택이다. 그러나 기왕 죽으려거든 아까운 목숨 함부로 버리지 말고 나라를 위해 버려라. 이 어리석은 위인들아. 알겠는가?”
열변을 토한 최우가 천천히 방향을 돌려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주군…….”
김준은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안장에 오르는 최우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차올랐다. 저런 성정을 가진 이를 위해서라면 제 한목숨 내놔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 들어찼다. 저런 마음으로 백성을 생각하는 이가 자신의 주군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6장 지는 별, 뜨는 해, pp.212~213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그리고 대장경은 불교의 상징이었다. 또한 그 옛날 국난을 극복하고자 군신과 백성들이 오랫동안 혼연일체가 되어 만든 국가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라의 큰 보물인 대장경이 번잡한 개경 근처에 모셔져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수기가 초조대장경을 부인사로 옮기는 방안을 의논해 왔다. 나라에 환란이 있거나 혹은 큰일이 닥치더라도 초조대장경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곳은 황도의 개경이 아니라 되도록 멀리 떨어진 지방의 사찰이어야 한다는 것이 수기의 생각이었다. 만일 몽고가 침략을 해오기라도 한다면 가장 위험한 지역이 고려의 수도 개경이었다. 더군다나 몽사가 고려의 국경에서 살해되었으니 언제 어느 때 몽고에서 공격을 가해올지 모르는 불안한 시국이었다.
팔공산의 부인사를 최우도 가본 적이 있었다. 터가 아늑하고 통풍이 잘 되어 대장경을 모시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 최우는 망설임 없이 수기의 청에 응했고, 군사를 지원했다. 수기는 지근의 사찰로 통문을 보내 초조대장경의 이송을 도왔다. 앞날을 내다보는 수기의 공력과 결단이 없었다면 결행되지 못했을 거사였다.
‘수기대사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작금의 사태를 겪고 나니 최우는 거듭 수기의 판단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장 시작된 여몽전쟁, pp.289~290
“자네는 지금까지 열심히 잘 싸웠네. 허나 우리와는 달리 자네에겐 주어진 소임이 있네. 주군의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톴가? 몽고군은 계속 남하하여 내려갈 것일세. 자네가 본 전선과 몽고군에 관한 것을 주군께 전해주게. 그래야 다음을 준비할 게 아닌가? 그만 어서 가게.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마치고 자넨 자네의 소임을 해야 하는 게야.”
혼자 살아남는 치욕을 범하지 않겠노라며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김준에게 이원종은 또 이런 말도 했다.
“지켜야 할 본분이 있어서 살아남는 건 치욕이 아닐세. 다음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자네가 할 일이 있어. 철주성의 병마사로서 마지막 군령을 내리겠네. 반드시 살아서 이 성을 빠져나가 전하게.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반드시 전하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고려의 여느 무인보다 용맹하고 강건했던 병마사 이원종은 김준이 철주성을 벗어나 개경으로 향한 지 며칠 뒤에 자신의 수장들과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 무인이었다. 이원종과 그의 장수들은 적의 포로가 되어 비굴한 생을 연명하느니 고려의 무신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키는 최후를 선택한 것이었다. ---9장 시작된 여몽전쟁, pp.298~299
“이것은 단지 우리 고려를 압박하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야. 시작일 뿐이네. 저들은 점점 더한 요구를 해올 것이고, 우리 백성들은 저들의 공물을 채우는 도구가 되어 작금보다 황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란 말일세. 그리고 무엇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백성들의 항전 의지일세. 우리 고려의 백성들은 말이야. 옛 고구려의 후예들이야.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강해.”
마디마디 이어가는 최우의 목소리가 점점 열기를 띠었다.
“자네가 말했듯이 이번 침략으로 무수한 장졸들과 관민들이 아깝게 명을 달리했어. 허나 백성들의 대다수가 몽골의 지배를 받는 속국의 국민으로 살기보다는 큰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이 땅의 주인으로서 당당히 살기를 원하고 있단 말일세. 당장의 화난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단 말이야. 그렇기에 귀주성을 위시한 여러 산성의 군사들과 관민들이 항몽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이겠지.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모른 척할 수 없네. 우리 땅을 침노한 저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저들의 약점을 이용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장기항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네. 적들에게서 우리의 주권을 지키고 싶단 말일세.”
최우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길고 긴 말을 마쳤다.
---10장 짓밟힌 황국, pp.3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