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아아이 별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수가 없는 염서(炎署)계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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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법 한 사람의 사회인의 자격으로 일을 해보는 것도 아내에게 사설듣는 것도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로웠다, 생활이 스스로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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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있자, 나는 잠시 내 신세에 대해서 석명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를테면 적잖이 참혹하다. 나는 아마 이 숙명적 업원을 짊어지고 한평생을 내리 번민해야 하려나보다., 나는 형상없는 모던 보이다, 라는 것이 누구든지 내 꼴을 보면 돌아서고 싶을 것이다. 내가 이래봬도 체중이 14관이나 있다고 일러드리면 귀차는 알아차리시겠죠? 즉, 이 척신이 총알을 집어먹었기로니 좀처럼 나기 어려운 동굴을 보이는 것은 말하자면 나는 전혀 뇌수에 무게가 있다. 이것은 귀하가 나를 겁낼 중요한 비밀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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