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 초등학생 때부터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가요와 팝송을 들으며 음악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학생 시절 똑같은 양복을 입은 네 명의 젊은이들이 다소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I Want to Hold Your Hand’라는 노래를 부르는 저화질의 영상을 보고 멜로디와 하모니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한때 하드록과 헤비메탈은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다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에게 빌린 머틀리 크루의 『Theater of Pain』 테이프를 듣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역시 친구를 통해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를 테이프에 복사하여 들은 후 헤비메탈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프로그레시브 록, 포크, 사이키델릭, 클래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가지며 음악 사랑을 이어갔고, 좋은 음악은 장르와 무관하게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출판 업계의 불황으로 번역 관련 부업도 열심히 병행하고 있다.
이정일 초등학교 시절, 마이클 잭슨의 ‘Beat It’과 ‘Billie Jean’은 라디오에서 비교적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영어를 몰라 그저 귀에 들리는 소리에 의지하며 엉터리 발음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중학생이 된 후에는 시나위, 들국화, 부활 같은 국내 록 밴드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사의 의미와 해석보다는 날카로운 기타 소리와 힘찬 샤우팅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의 귀는 록 음악의 강렬한 에너지를 가리지 않고 쏙쏙 흡수했다.
그 무렵 『La Bamba』라는 영화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었다. 극기 훈련 장기자랑 시간에 통기타로 라 밤바를 연주하며 노래한 한 친구의 모습에 열광하는 선생님과 학우들. 아마 그 일을 계기로 나도 기타를 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친구의 권유로 헤비메탈에 입문하게 되었다. 나를 메탈의 세계로 안내한 곡은 헬로윈의 ‘Future World’였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심장 박동이 기타 리프에 맞추어 뛴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잡았고, 취업 후에는 직장인 밴드를 결성하여 작은 소망 하나를 실현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무대에서 직접 연주하고 공연하는 꿈을 이룬 것이다.
중년에 접어든 지금은 기타 대신 키보드(건반 아님)를 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출퇴근 시간과 쉬는 시간엔 항상 음악을 귀에 달고 산다. 자유와 시간이 넘쳤던 젊은 시절은 지나갔지만, 지금도 여유가 생기면 다시 해보고 싶다. 내게 이렇게 음악에 관한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나는 지금 10대 청소년의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이한준 국민학교 때부터 왬과 보이 조지에게 미쳐서 한동안 팝송만 들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다른 장르의 음악은 거의 듣지 않고 클래식과 재즈만 듣는 음악 편식주의자다. 한술 더 떠 클래식 중에서도 바로크만, 그리고 재즈는 50~70년대 비밥과 보사노바만 듣는다. 게다가 여자보다 와인을 사랑하는 와인 성애자이기도 하다. 오랜 경험을 통해 바로크와 재즈 음악이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와인과 잘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라는 사실을 터득한 후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재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비주의에 입각한 음주 결사조직, 와인 십자회(Wein Kreuz)를 이끌며 한량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남자만 있는 술자리는 청와대에서 불러도 절대 가지 않는 호연지기와 지조를 지키고 있지만, 슈퍼투스칸 와인이나 가라지 와인이 있으면 남자만 있더라도 눈을 질끈 감고 참석해 주는 넓은 아량과 관대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오공훈 초등학교 5학년 2학기부터 해외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먼 거리 통학을 위해 버스를 갈아타느라 새문안로를 매일 걸었다. 당시 지금의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과 광화문역 사이 거리에는 음반 가게가 참 많았다. 진열대에 놓인 바이닐을 넋 놓고 구경했다. 음악애호가의 본능과 숙명이 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 삶은 정해졌다. 음악이 인생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음반 수집에 목숨을 걸었다. 팝·프로그레시브 록·헤비메탈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당시는 외국 음악을 온전히 들을 길이 막혀 있었다. 나는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카세트테이프와 LP를 모았다. 이것도 나름의 저항정신이라고 굳게 믿었다. 심지어 친척이나 친구의 음반을 빌려와 은근슬쩍 안 돌려준 경우도 있었다. 공소시효가 한참 지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학교에 들어가니 민주화와 CD의 대중화라는 혁명이 찾아왔다. 이때는 주로 재즈·펑크 록·얼터너티브 록에 심취했다. ‘100대 명반’ 사냥에도 나섰다.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언제나 돈이 문제였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손에 넣는 족족 음반 구매로 탕진했다.
취직 후엔 인터넷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아마존을 알게 되니 못 구할 음반이 없었다. 신용카드가 마구잡이로 발급되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음반을 사들였다. 그러다 카드대란이 터져 큰 시련을 겪었다. 소장했던 음반 상당수를 팔아치워야 했던 아픔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로 몸을 사린다. 때마침 MP3의 실용성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다 유튜브와 스트리밍을 만났다. 지금은 무궁무진한 음악 천국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음악과 얽힌 약력을 싸놓고 나니 내 전체 인생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음악에 살았고 음악에 죽게 생겼다. 어린 시절 듣던 음악을 뒤적이며 추억에 잠길 때도 있지만, 아직 못 들어본 음악이 너무나 많다는 조바심에 몸과 마음이 괴롭다. 이 세상 모든 음악을 모조리 듣는 게 남은 인생의 최대 목표다. 음악이란 끝이 없어 과연 그 꿈을 이룰지는 불확실하다. 현재는 출판번역 일을 하면서 음악에도 몰두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