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명예교수(서양사 전공)로 있다. 저서로는 『마키아벨리와 국가 이성』 『서양사 산책』 『손에 잡히는 서양사 이야기』 『문명의 충돌』 『지중해 문화사 이야기』 『시민적 휴머니즘과 인간·역사·과학』 『뒤집어 읽는 역사 이야기 55』 『주니어를 위한 역사 이야기』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 『초기 기독교 이야기』 『비잔틴제국-천 년의 명암』『오스만제국-지중해의 세 번째 패자』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르네상스 시론』 『르네상스의 사상과 그 원천』 『서양 근대사 1500~1815』 『휴머니즘과 르네상스 유럽 문화』 『서양 사회주의의 역사』 등이 있다.
대상으로 성공한 무함마드는 25세 때 40세의 하디자와 결혼했고, 그 후 메카 부근의 한 동굴에 들어가 명상하고 수도했다. 그는 단식과 명상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결혼 후 15여 년이 지난 40세에 “알라의 뜻에 따르라”라는 계시를 받았고, 그때부터 그는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외치며 알라의 진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아라비아어로 ‘복종’을 의미하며 ‘무슬림’은 ‘복종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슬람이란 결국 유일신 알라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꿈에 지브랄(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아 천마를 타고 예루살렘의 한 바위에 도착해 기도한 후 그의 인도로 빛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라 알라로부터 진리를 계시 받고 빛 사다리를 타고 그 바위로 내려온 다음 천마를 타고 메카로 돌아왔다. 무함마드는 유일신 알라가 자신에게 천국의 진리를 계시하고 자신을 사자, 즉 ‘라술라하(알라가 보낸 사람)’로 삼았음을 확신했다.(10-11쪽)
이처럼 초기의 세 칼리파는 예언자의 혈통이 아니면서도 칼리파로 선출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초대 칼리파는 곧바로 타계했고 2, 3대 칼리파는 피살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더 강하게 제기되었고, 그 주장은 당연히 다수 무슬림의 지지를 받았다. 이른바 혈통주의자들로서는 자신들의 소망을 성취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목민 시절의 자유를 동경한 일부 아랍인들은 칼리파의 강력한 권위에 불만을 표했다. 656년에 제3대 칼리파가 암살되자 그것을 계기로 이슬람세계는 드디어 분열했다. 혈통주의 칼리파제를 주장한 시아파와 칼리파의 선출제를 주장한 순니파로 분열한 것이었다.(48-49쪽)
이미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이 1453년에 비잔틴제국을 정복하면서 발칸반도가 점차 무슬림의 땅으로 변해 갔지만 뚜르에서 이슬람 측이 승리했을 경우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슬림들이 뚜르전투에서 승리했었다면 오늘날 프랑스의 남중부는 물론 파리에서도 발칸반도에서와 같이 대소의 모스크들에서 무슬림들이 『꾸란』을 낭송하는 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나우강 이남 지역처럼 라인강 유역도 무슬림들의 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무슬림들은 그처럼 프랑스를 알라의 땅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 기독교 국가들은 캬탈로냐와 나바르 등 일부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했을 뿐 이베리아반도는 무슬림의 땅이 되었고, 그때부터 이베리아반도는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의 처절한 각축장이 되었다.(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