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땔감을 구하고 허드렛일을 하느라 초등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금릉초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피란민으로 들끓는 부산 국제시장으로 가 간판집 견습공이 되었다. 그 후 실 공장 견습공을 하다가 결핵 증세 때문에 다시 김천으로 돌아왔다. 1957년 어머니가 있는 부산으로 형제가 다시 갔다. 부산 국제시장 1공구 A동에 진을 치고 장사를 했다. 야경꾼 노릇도 하고, 싸전에 들어오는 쌀가마니를 옮겨 주고 품삯을 받기도 하고, 시장의 온갖 짐을 나르는 짐꾼 노릇도 했다. 그 돈으로 헌책을 사다가 읽고 세 식구 입에 풀칠을 했다. 돈이 몇 푼 모이면 부산 시립 도서관 용두산 밑에 계시던 어머니께 드리고 클래식 다방과 책을 대여해 주는 대본소를 전전하며 문학 책을 제법 많이 읽었다. 1960년 동생 준언의 도움으로 부산 동아고등학교 야간부 2학년에 편입했다. 부산 ≪국제신문≫, ≪민주신문≫의 학생 문단에 투고한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드나들며 사서 읽은 문학작품으로 지독한 문학 병을 시름시름 앓았다. 그 후에도 ≪국제신문≫, ≪부산일보≫, ≪민주신문≫에 작품을 투고해 발표했다. 1979년 ‘갈숲’ 동인(향파 이주홍, 운성, 구상, 청남 오제봉, 박순녀, 송원희, 박노석, 우인, 송지영)에 참여했다. 1981년 1월 1일자 ≪한국일보≫에 컬러판 ‘새해 아침에 함께 복을 여는 페이지’ 특집으로 한국 최초 새해 컬러 동화 ≪까치네 집≫(우현 송영방 화백 그림)이 게재됐다. 1987년 ≪새벗≫에 장편 해양 동화 ≪안개 섬 동굴≫을 연재하고 성인 시 창작에 몰두했다. 1995년 월성초등학교에서 ‘등꽃나무 아래서의 시와 음악’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들과 반 학예회를 열었고, 2000년 창녕 명덕초등학교에서 ‘장미꽃 울타리에 시와 음악’이라는 생명 시화 및 시 낭독회를 열었다. 2003년 36년 동안의 초등 교사 및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의 생활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