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봄으로 넘어가는 문턱, 두꺼운 외투가 조금은 얇아진 그 날 그는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문자가 왔다는 사실을 며칠 뒤에야 알았다.
그 시각, 그는 홍대에 자리 잡은 자신의 아틀리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신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그러하듯, 그도 작업에 한 번 빠져들면 시간이 가는지, 배가 고픈지, 모든 걸 잊어버리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떤 빛도 들어오지 못하게 쳐진 검은 커튼은 아틀리에 안의 작은 소음까지 흡수하는 것 같았다. 가끔 붓을 씻는 소리만이 그 공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화폭에 붓을 터치하는 모습은 지휘자가 지휘하듯, 부드러웠고, 날카롭고, 힘이 있었다. 그의 눈이 반짝일수록 하얀 피부는 더욱 창백해 보였다.
탁자 위에 있는 휴대폰이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지만, 그는 감지하지 못했다.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주위의 소음까지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진동이 울리다 멈췄다. 그리고 문제의 그 문자가 도착했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그는 화폭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물감으로 가득 채워진 캔버스엔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검은색으로 변해 버린 물속에 붓을 집어넣고는 완성된 그림을 보며 부족한 점은 없는지 살피며 헤드폰을 벗었다. 헤드폰 사이에선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세계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게 만드는 그만의 방법이다.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며 그림의 마무리 작업을 했다. 그때 입구라고는 없을 것 같던 아틀리에 문이 벌컥 열리며 준이 뛰어 들어왔다.
“형!!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왔어?”
누군지 쳐다보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다.
“아∼ 형!”
“왜―”
여전히 시선은 그림에 향한 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짜증이 난 준은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괴성을 질렀다.
이번엔 그가 짜증스럽게 준을 노려보았다.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그 난리를 피우고 며칠째 잠적하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말이야?”
“난리라니, 무슨 소리야?”
준은 자신과 달리 평온한 그의 모습에 허탈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내가 작업실 말고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잠적이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성의 없는 그의 물음에 기막히다는 듯 되묻는 준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하고,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인희 누나 졸업식인 거 잊었지.”
“아!”
그의 짧은 외마디가 대답을 대신했다. 여자친구 대학원 졸업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지금 몇 시지?”
준에게 시간을 물으며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열한 시.”
이번엔 준이 건성으로 시간을 말하며 그를 막아섰다.
“형, 안 가도 돼.”
자신을 잡는 준이 의아해 쳐다봤다.
“졸업식은 오늘이 아니라 열두 시간 전이었고, 지금은 낮 열한 시가 아니라 밤 열한 시야, 형. 동굴처럼 깜깜하게 해놓고 있으니 밤인지 낮인지 감도 안 오지.”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그는 황급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수십 통의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었다. 인희와 준에게서 번갈아 걸려온 전화들이었다. 인희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멘트만 들려올 뿐이다. 그가 인희를 만나기 위해 움직이자 다시 준이 잡았다. 이미 소용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이미 떠났다고.
그때가 되어서야 인희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잘 지내.
달랑 이런 문자만 남겨져 있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아 준을 쳐다봤다.
답답하다는 듯, 준은 한숨을 내쉬며 문자의 뜻을 해석해 줬다.
“형, 차였어. THE END. 쫑! 끝이라고.”
준의 말에 더 납득이 되지 않는 그였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왜’라는 단어만 떠다녔다.
그때 인희가 전해달라던 그녀의 편지를 준이 건넸다.
“그러게 내가 뭐라 했어. 자기 일에 빠져 사는 사람 매력은 한순간이라고. 평소에 잘하라고 했어, 안 했어!”
준은 숨 막히는 상황을 깨보겠다며 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차였다는 말에도 거의 미동도 없던 사람이 편지를 읽으면서 표정이 일그러지자, 준이 의아해 바라봤다.
“형, 괜찮아?”
그가 편지를 순식간에 구겨 버렸다.
“미친!”
“재우…… 형?”
재우가 던져 버린 편지를 펼쳐 보던 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쳐다봤다.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 재우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분노를 드러냈다.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뜻을 가진 이름, 가온.
이가온,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첫 아이가 태어나자 세상을 전부 가진 느낌을 받아 지은 이름이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온이라 이름을 지은 건 최대의 실수라고 입버릇처럼 딸에게 말하곤 한다. 그건 가온, 그녀도 동의한다. 32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세상의 중심, 아니, 가족의 중심이 된 적이 없었으니까.
한 살 터울인 남동생 다온이 태어나기 전까진 누렸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시절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좋은 일은 모두 온다는 뜻으로 지어진 다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의 동생은 그 이름대로 잘살고 있었다. 학업 성적은 항상 상위 1%였고, 명문대 입학은 물론 대기업 취직까지 이뤘다. 그리고 항상 수많은 여자를 몰고 다니더니 이젠 쇼핑몰로 억대를 버는 예쁜 여자와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는 가온은?
그녀는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말을 가끔 할 뿐이었다.
“이혼해, 이혼! 그 나이 먹었으면 이젠 정신 차릴 때도 됐잖아. 언제까지 사고 칠 거야!”
“나 좋으라고 그랬어? 당신 동생 일이잖아. 처제가 힘들다는데 그럼 모른 척해!”
“당신 앞에 있는 난 안 보여? 환갑 바라보는 마누라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누가 누굴 걱정해!”
가온의 부모는 오늘도 예고 없이 부부싸움을 시작했다.
왜 아빠는 상의도 없이 보증을 서서 이 사달을 만든 건지. 세상에서 젤 재밌다는 게 불구경 다음으로 싸움 구경이라지만 부부싸움만큼 괴로운 것도 없었다. 가온은 말리다 덩달아 엄마에게 욕을 얻어먹은 경험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골이 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가온은 어릴 땐 ‘이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엄마와 아빠 중에 누굴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었지만, 그 고민이 부질없다는 걸 알게 됐다. 싸우면 으레 그 단어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엄마의 목소리를 잠식시킬 만큼 볼륨을 높여서 ‘멘붕’을 따라 불렀다.
이젠 집중을 하고 모니터를 보면서 일할 시간이다. 연애 칼럼니스트인 가온의 주된 업무가 비평이다.
상담? 말이 좋아 상담이지, 뻔한 것들을 상담이라고 물어오면 짜증이 폭발해 비평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담을 극단적인 비평을 하게 된 건, 직업에 대한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좋아할 때도 있지만, 글을 쓰면서 받는 질타 또한 무시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일을 해야 하나, 라는 생각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우선은 먹고살아야 하기에 그런 고민은 일단 접었다.
밀린 상담들을 훑어보니 오늘도 가온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연이 들어와 있었다.
―남자친구가 자꾸 거짓말을 해요!
제목을 보는 순간 가온이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헤어져!
제목만 봐도 뻔했다. 거짓말을 했으면 걸리지 말든가, 왜 걸려서는 빌고 변명하고. 그런 남자친구를 두고 여자들은 왜 또 고쳐 주지 못해 안달인지. 남자의 엄마도 고쳐 주지 못한 버릇을 자신이 고치겠다는 발상부터 잘못된 거라 생각한다.
아니면 자신이 평강공주라고 착각을 하는 것일까? 바보온달이 장군이 되는 그날까지 희생이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다 사랑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있었다. 사랑하면 거짓말쯤 눈감아주라고. 가온이 이렇게 말하면 또, 사랑하면 그 정도는 고칠 수 있는 문제 아니냐고 묻는다. 그럼 그녀는 고치고 싶을 만큼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들로 짜증이 밀려오지만 그럴듯한 말로 잘 다독여야 했다. 그녀의 밥줄이니깐!
가온은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뻔한 답을 상담이라고 해주고 있다.
―너의 거짓말로 내가 받은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아? 너의 거짓말로 깨진 신뢰만큼 사랑에도 금이 갔어! 라고 설득해 보세요, 그 후에도 변화가 없다면 미련 없이 헤어지세요.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다 말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멘붕, 멘붕! 이라는 가사가 울려 퍼졌다. 지금 가온의 심리 상태가 딱 이러했다.
멘.붕.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 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폭풍 전야. 가온의 짐작대로 예고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가족이란 이런 거다. 방문에 일하는 중이라는 팻말을 아무리 걸어도 노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존재. 애인과 피 토하는 사랑싸움을 하고 있건, 헤어져서 우울 모드로 눈물을 흘리고 있건 아랑곳하지 않고 방해할 수 있는 갑인 존재.
그 존재의 슈퍼 갑, 엄마!
가온의 엄마, 미정은 싸움의 대상을 아빠에게서 가온에게로 옮겨왔다. 미정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다.
“넌 박쥐 새끼처럼 집에만 처박혀 있어?! 주말에 데이트도 안 해?”
응. 안 해! 라고 당당히 대답하는 가온이다.
매일 나가는데 주말이라도 집에서 쉬면 안 되는 걸까.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또 나머지 6일을 빨빨거리고 싸돌아다닐 것 아닌가. 이런 그녀의 사정과 상관없이 미정의 공식 레퍼토리가 나온다는 건, 오늘도 편히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말했다.
왜 황금 같은 주말을 쉬어야 한다는 아저씨 같은 마인드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벌써 미정의 잔소리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히 일하던 노트북을 덮고, 이어폰을 빼고 미정을 응시했다. 아니,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미정이 쏘는 레이저를 정면으로 맞받았다.
“남자 없는 게 자랑이야?! 다온이 결혼식 어쩔 거야! 설마, 혼자 와서 서 있을 건 아니지?”
이건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다. 애인이 없으면 알바라도 써서 함께 서 있으라는 미정의 말은 제대로 충격이었다.
“엄만, 엄마 딸이 그렇게 모자라 보여? 알바까지 고용하게?”
“내 말이 그 말이다. 어디 하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처박혀 있어! 중심이 안 되면 귀퉁이라도 돼야 할 거 아냐!”
또다. 이름을 이용한 공격.
이참에 이름을 귀퉁이로 개명을 할까 하는 잡생각은 미정의 무차별 공격으로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가온은 미정의 입술을 쳐다보며 결혼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말하는지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수많은 방법 중에 하나지만, 수천 번을 들어도 결혼 적령기인 가온이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왜! 어떤 말로 시작을 해도 결론은 항상 결혼으로 끝날까. 이젠 신기하기까지 하다. 조금 전까지 이혼하자고 소리치던 엄마가 하는 말치곤 너무 모순적이니깐.
동생은 하는 결혼, 너는 왜 못 하냐며 모지리로 만들고 있는 엄마, 그 입에서 폐경이라는 단어까지 나오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됐어! 나 혼자 살 거야!”
가온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하고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슴속 깊이 잠재돼 있던 말을 드디어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순간 왜 이렇게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래, 나 혼자 사는 거야. 화려한 싱글 라이프!
그것이 앞으로의 이가온의 미래다.
퍽!
갑작스러운 독신 선언에 돌아온 건 머리를 강타한 미정의 매운 손이었다. 언제나 육체적 공격이 뒤따른다는 걸 한순간 잊고 있었다.
“아, 왜 때려!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독신으로 살 거야!”
“미친년! 독신 같은 소리 한다. 연애할 능력이 안 되면 안 된다고 해!”
“능력 안 된다고 누가 그래, 하기 싫을 뿐이야.”
“곧 죽어도 안 된다고는 말 안 하지. 정 안 되면 성형이라도 해!”
요즘 말로 진짜 ‘헐’이다. 딸내미 못생겼다는 말을 저런 식으로 하고 싶을까? 예쁘진 않아도 귀염상이라고, 날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고 했던 남자도 있었다는 걸 다시 강조해 봤자 엄마에겐 소용없는 일이다.
자신을 쏙 빼닮은 딸을 보면서 어떻게 엄마가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가 있는 건지 가온으로선 알 수 없었다. 가온의 연애 흑역사는 본인 때문에 시작됐다는 걸 미정이 잊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2 여름, 그 뜨거웠던 가온의 여름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 그녀의 엄마였다는 사실을.
***
여전히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매미가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야자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콤할 수 있다는 걸 가온이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흐르는 땀이 손에 맺혔지만 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남자친구가 생겼고, 순수했던 그 시절은 모든 것이 좋았다. 그녀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두근거림을 느꼈다.
집 앞 골목에 들어선 남자친구와 가온은 미묘한 감정을 느꼈고, 서로에게 끌렸다. 그렇다. 첫 키스의 순간이 온 것이다.
두근두근!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박동 소리는 가온의 심장 소린지 남자친구의 심장 소린지 모를 떨림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생애의 첫 키스를 하려는 순간, 하늘에서 물벼락이 떨어졌다. 소나기가 아닌, 말 그대로 물벼락이.
가온의 엄마, 미정이 양동이 한가득 그들을 향해 물을 퍼부었다. 또한,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내 딸 앞에 얼쩡거리면 고자로 만들어 버릴 줄 알아!!”
가온의 순수했던 남자친구는 사색이 되어 도망갔다.
“경식아―!”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첫 남자가 될 뻔했던 조경식. 그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잊을 수 없는 이유가 단지 그 일 때문이었던 건 아니다. 그날로 가온의 첫 연애가 백지화돼서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가 너무 순수해 보이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일은 연애의 흑역사를 학창 시절을 흑역사로 바꿔놓았다.
경식이와의 일이 소문나 학창 시절 내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엄마가 사고 치지 못하게 미리 으름장을 놓았다지만, 그 일로 가온의 주위엔 냉각장치를 설치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 일로 미정에게 자신의 연애에 관해 절대 알리지 않았다. 미정의 간섭으로 또 다른 흑역사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들켰을 때를 제외하고는.
아닌 게 아니라, 들켰을 땐 얘는 키가 작아 싫다, 비전이 없어 보인다, 성깔 있어 보인다 등의 이유로 가온의 연애를 간섭했다. 미정이 항상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지만, 가온의 결론은 이랬다.
제대로 된 남자는 없다. 그냥 문제 덜 있는 남자가 있을 뿐.
그래서 그녀는 연애 회의론자, 결혼 회의론자가 됐다. 그렇다고 남자들을 경멸하는 건 아니다. 외로울 땐 연애를 하니깐. 지금은 잠시 휴식기를 갖고 있을 뿐이다. 치를 떨며 헤어진 수많은 남자 덕분에 말이다.
***
가온은 독신으로 살 거면 집을 나가라는 미정의 말을 듣고 행동에 착수했다. 화려한 싱글 라이프의 첫 번째 조건인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먼저 인터넷과 부동산 앱을 뒤지기 시작했다.
살고 싶은 곳 서울, 클릭. 지역은 고심 끝에 부모님 집과 너무 떨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송파구로 정했다. 클릭.
그녀의 행동은 여기에서 끝이 났다.
뉴스에서 전세 대란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전세를 찾을 수도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돈이라도 모아서 골드미스 대열에나 오를걸, 그냥 올드미스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남자보다 통장, 같은 책을 흘려 읽은 지난 세월을 한탄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 없던 가온은 직접 발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동산으로 향했다.
***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게 서재 안을 비췄다. 햇살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 있는 재우는 뒷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뒷모습을 보면 앞모습이 궁금해지고, 앞모습을 보면 감탄을 절로 나게 하는 그런 비주얼의 남자다.
그는 잡지의 일부를 스크랩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준이 들어왔다. 재우는 스크랩북을 황급히 덮어 하던 행적을 가렸다. 성가신 녀석이 왔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노크.”
준은 열려 있는 문을 잡고 노크를 했다.
똑똑―
“됐지?”
“비밀번호를 바꾸든지 해야지.”
볼멘소리하는 재우지만 그의 말에 지지 않고 대꾸하는 준이었다.
“비밀번호 바꿔도 소용없을걸.”
준은 보조키를 들어서 흔들어 보였다. 재우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릴 뿐 뭐라 하지 않고 고개를 책상으로 돌렸다.
“무슨 일인데.”
준을 보지 않은 채 책상에 펼쳐져 있는 잡지를 덮었다.
“나 정말 여기서 살면 안 돼?”
“죽을래.”
재우는 행동을 멈추고 준을 쏘아보았다. 진심에서 나오는 눈빛이다. 준은 움찔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형 혼자 살기엔 여기 너무 크잖아. 아줌마도 걱정하시고.”
흘리듯 말하는 준은 재우의 엄마를 언급했다. 늘 혼자 지내는 재우를 걱정하는 그의 엄마에 대해 잘하는 준이었기에. 재우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준이 농담이라며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재우는 안절부절못하는 준의 모습을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쳐다만 볼 뿐이다. 어떤 의중이 있어 저런 말을 하는지 살피기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준의 의중을 먼저 알아내기 전, 재우가 뭘 하고 있었는지 준이 먼저 파악했다. 재우는 황급히 책상에 놓여 있는 스크랩 흔적을 치웠다.
“뭐야, 형…… 기사 스크랩도 해?”
재우의 표정을 살피던 준은 그가 치우려는 잡지를 낚아채 피식 웃었다. 잡지 표지엔 ‘화가 신재우, 그가 말하는 그림’이라는 머리 제목이 적혀 있었다.
“형이 나온 기사 스크랩하는 거야? 아저씨 같아서 이런 건 안 한다더니. 뭐야, 안 어울리게. 나도 좀 보자.”
재우는 스크랩북을 잡는 준의 손을 막았다. 같이 살겠다는 준의 말보다 더 노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자기애가 강했구나, 형.”
새로운 재우를 발견했다는 듯 말하다 그의 얼굴에서 살벌함을 느낀 준은 한발 물러섰다.
“올라오다 보니까 이사 오는 것 같던데…… 그 집 나갔어?”
재우가 사는 건물엔 오랫동안 비어 있던 집이 있었다. 그 집에 이삿짐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한동안 비어 있더니 어떻게 집이 나갔네. 저 정도 집은 얼마나 하나? 내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전망이 또 끝내주니깐…….”
준은 신세 한탄을 하며 재우를 애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망설이다 한마디 덧붙였다.
“이 건물엔 내가 살 만한 빈집 없지? 형.”
다시 한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준이 말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간파한 재우가 말했다.
“왜 왔어?”
그의 물음에 준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재차 물었다.
“여기 온 진짜 이유, 뭐야? 말 안 할 거면 됐고. 다신 안 물어.”
재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서 나가려고 하자 준이 재빨리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재우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준의 손을 내려다봤다.
“형…… 나 쫓겨났어.”
준이 잡은 손에 힘을 가하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서는 재우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진짜 여기서 지내면 안 돼? 형아.”
재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준을 빤히 볼 뿐이었다. 좋다, 싫다 거절을 표하지도 않은 채 그냥 준을 바라봤다. 준은 그런 재우를 끈질기게 쳐다봤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애절한 눈으로 보고 또 바라봤다.
재우는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는 듯 준의 손을 뿌리치고는 서재를 나갔다. 장화 신은 고양이 버전이 안 먹히는 사람은 재우뿐이라며 준이 툴툴거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를 쫓아 나갔다.
“아, 형! 나 쫓겨났다니깐! 이유는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재우는 거실 한복판에 놓여 있는 준의 캐리어를 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관심 없어.”
이 짧은 한마디로 인해 제대로 상처받은 준은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캐리어를 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재우는 처량하게 나가는 준의 모습이 오히려 신경 쓰였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 소리쳤다.
“들어와! 하나, 둘…….”
셋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준이 미소를 머금고 뛰어 들어왔다.
재우는 준이의 해맑은 표정으로 들어오자, 자신이 이번에도 준에게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 나 저쪽 방 쓰면 돼?”
재우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준이 캐리어를 끌고 작은 방으로 향했다.
“아니.”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재우로 인해 준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네가 쓸 방은 따로 있어. 따라와.”
재우는 이 말만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
“형, 여기 방 많은데……. 아, 어디 가는 데.”
준은 아쉬운 듯 재우의 집을 돌아보다 마지못해 그를 따라 나갔다.
***
가온이 야심 차게 향한 부동산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찾은 부동산에선 소위 말하는 로열층을 자꾸 권했다.
옥탑방!
부동산에선 그 가격에 여긴 최상급이야, 라는 말을 덤이나 되는 양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는 옥탑방을, 등산코스를 방불케 하는 언덕에 있는 그 옥탑방을,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는 아가씨에겐 최적의 장소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하는 부동산 사장님.
평소에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만 하는 가온에겐 적합한 장소일지 모르겠다. 턱까지 차는 숨을 고르느라 헐떡이던 가온은 아파트 로열층 야경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옥상에서 전경을 내려다봤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강과 야경을 누릴 수 있는 호사를 선사하려는 사장님에게 감사하기까지 하다.
독신을 선언하고 독립을 하겠다는 큰 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가온은 그동안 자신이 캥거루족으로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집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갈까 하고 잠시 잠깐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뱉은 말이 있지, 이대로 항복하는 건 이가온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좋은 집에 혼자 살던데 대체 무슨 능력으로 살고 있는 거지? 하긴 그들은 능력 있는 부모가 있었다. 출발선부터 다르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차이는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부자가 아닌 부모님을 탓할 수는 없으니, 해외여행을 즐기고 쇼핑을 조금―명품 가방 몇 개와 유행에 맞는 의상 정도―즐겼던 자신의 지난날을 탓하며 다른 부동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다른 부동산에서 들은 말들도 한결같았다.
“그 돈으로는 전셋집 못 구합니다.”
“이 정도면 월세 싸게 나온 거예요.”
“원하는 조건으로 찾으려면 서울 근교도 그 돈으로는 월세 구해야 할 겁니다.”
결국, 어느 한 곳도 그녀가 가진 돈으로는 구할 수 없다는 말만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소연할 곳을 찾다가 오랜만에 친구 은정을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는 가로수길에서 그녀의 집으로 바뀌었다. 답답한 당사자는 가온, 자신이기에 귀찮은 몸을 이끌고 은정의 집으로 갔다.
순간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깨달았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여섯 살과 네 살 남자아이들을 보는 순간, 왜 조용한 찻집이 아닌 집에서 보자고 했는지 확실해졌다.
은정은 고등학교 동창 중에 제일 먼저 결혼한 친구다. 고등학교 때부터 꿈이 현모양처였던 은정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수더분하게 생긴―아저씨 같은―여덟 살이나 많은 남자와. 다들 미쳤다고 뜯어말렸지만, 콩깍지가 쓰인 은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포근하고 아빠 같은 자상한 남자를, 이상형을 놓칠 수가 없다며.
그랬던 은정이 처음 볼 때부터 아저씨 같다고 친구들이 말했는데 그건 잊은 모양이다.
“나이 많은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아재 같은 말만 골라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은정.
“그래도 결혼 전엔 곰돌이 푸우같이 포근하고 좋더니, 배가 남산만 해서는 난 셋째 낳는 줄 알았잖아.”
이 말을 해놓고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자지러지게 웃는 친구를 보면서 너도 아줌마 다 됐구나, 라고 가온은 생각했다. 예쁘진 않아도 귀엽게 꾸미는 걸 좋아했던 은정은 대충 걸쳐 입은 티에 편한 추리닝을 입고 앉아서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서로 번개맨이라며 번개 파워를 쏘면서 상대가 죽지 않는다고 싸우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두 아이.
가온은 정신없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친구가 말한다.
“넌 언제 결혼해? 지난번 홍대에서 밴드 한다는 남자는 잘 만나고 있어?”
“그 남자는 3년 전에 헤어졌어.”
이 대화를 끝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은정은 가온과 나눴던 대화들을 기억하지 못했고, 가온은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어머니와 남편 흉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통에 자신의 얘긴 꺼내지도 못했다. 아니, 말하기 싫었다.
원래 상담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하는 것이지 총과 칼이 공격하는 상황―사랑스러운 친구의 아들 녀석들이 끊임없이 가온을 악당이라 부르며 공격해 왔다―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은정의 집을 나오면서 두 가지는 확실해졌다. 오늘부로 한동안은 이 친구를 만나지 않을 것이고, 또 하나는 독신으로 살아야겠다는 확신이다.
***
가온이 고심 끝에 엄마에게 결혼 자금을 당겨달라고 말했다가 또 맞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결혼 자금이 왜 필요하냐며.
가온의 상황을 지켜보던 아빠, 상호는 딸내미, 그냥 아빠랑 오순도순 살자, 라는 말로 회유했다. 그 말은 즉, 엄마로부터 방패막이로 자신을 쓰시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가온은 알고 있었다. 32년을 상호와 함께 살면서 터득한 대화의 속 풀잇법이다.
달콤한 말로 가온을 꼬드겨 피 보게 한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다시 상호에게 말릴 수 없다는 생각에 무언의 방어막을 쳤다. 그랬더니 상호가 자신의 전용 소파에 앉아 베란다 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또한 연막작전이었다. 나이 들어 처량한 것처럼 보기 싫은 것도 없다는 사실을 상호도 알지만, 그만의 비책이기에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가온은 속상함에 괜히 짜증을 부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빠, 노인네처럼 왜 그러고 앉아 있어! 아빠도 이참에 엄마한테서 독립해!”
독립은 가온보다 상호가 시급해 보였다. 한평생 엄마, 미정에게 잡혀 살더니 노년엔 보증 문제로 미정 눈치만 보며 살게 될 거란 걸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가온이 아빠 걱정해서 한소리 한 것을 두고 노처녀 히스테리란다.
역시 부부는 한편이다.
아빠가 살아남기 위해선 엄마 편에 서야겠지.
확실히 노선을 정한 상호는 미정 편에 서서는 밥을 먹을 때,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 밖을 나올 때, 출타 후 집에 돌아올 때, 얼굴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 시집가라며 끊임없이 잔소리했다. 이럴 땐 미정보다 상호가 더한 강적이다.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다더니 말 없던 상호가 방언 터지니 미정보다 더했다.
더 이상 상호를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없음을 확신한 가온은 스스로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심한 가온은 전세금 대출을 알아보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그녀로서는 빚만 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부동산을 전전하면 할수록 실망은 배로 늘어갔다. 여성 전용 아파트는 들어가기 힘들고 로열 옥탑방은 싫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초라해진 몸뚱이를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길, 우연히 허름한 복덕방을 하나 발견했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희미한 자국만이 복덕방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부자복덕방
칠이 벗겨진 간판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으나 오히려 그 사실이 가온을 안심시켰다.
예전엔 분명 새것이었을 간판. 이 간판을 보고 부자가 되겠다며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가온처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쳤던 몸에 힘이 생겼다. 아직도 복덕방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이 안엔 장기를 두며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정말 싸고 좋은 곳을 알려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여기서도 못 찾으면 독립도, 화려한 싱글 라이프로 채워질 독신 생활도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온은 놀라고 말았다. 허름한 외관과 달리 안은 훨씬 넓고 세련되었다. 화이트, 블랙으로 꾸며진 모던 스타일의 사무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쾌적한 바람이 가온의 얼굴을 스쳐 갔다. 부자복덕방은 제대로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가온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화이트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채우지 않고―두 개가 적당하다, 세 개는 느끼해진다―블랙 스키니 진에 삼선슬리퍼를 신고 홈쇼핑 책자를 보고 있는 젊은 남자였다.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꽃미남으로 바뀌자 덤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안구 정화가 되는 순간, 귀까지 호강을 누렸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과 함께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잘못 들어온 것은 아닌가 싶어 밖으로 나가 간판을 재차 확인하고 들어갔다. 복덕방이 아니라 사람 홀리는 다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온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이 남자는 계속 미소를 짓고 있다. 신기하다는 듯.
여기 복덕방 맞죠, 라고 묻는 가온의 말에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듯 또다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그녀의 광대가 승천하려고 한다. 이럴 때면 가온은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저씨들이 아이돌 여가수들을 보며 헤벌쭉 좋아할 때나 자신이 잘생긴 남자 배우를 보면서 좋아할 때가 같다고.
가온에게 미소만 날리며 삼선슬리퍼―모델 포스에 어울리지 않는 슬리퍼가 눈에 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참을성 없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집 좀 보려는데, 혼자 살 만한 집 없을까요?”
이번에도 왜 자신에게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알쏭한 표정을 짓는 삼선슬리퍼다.
가온은 뭐 하고 있어, 빨리! 라는 의미로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랬더니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삼선슬리퍼가 ‘아!’라는 외마디를 하고는 다시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이 남자의 미소,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가온이 누구인가. 남자가 어떤 동물인지 너무나도 잘 아는 그녀가 아니던가.
자신의 매력을 이용할 줄 아는 미소쯤은 눈 호강으로 그냥 넘길 수 있는 강철 여인. 그런데 매력 발산 미소가 뭔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바뀌자, 가온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삼선슬리퍼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앉으라며 소파를 가리켰다. 남자의 표정을 자신이 잘못 읽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소파에 앉았다.
“혼자 살 집이면…… 독신입니까?”
삼선슬리퍼가 그렇게 묻는다. 그런데 가온은 독신이라는 단어를 낯설게 느꼈다. 미혼이세요? 라든지 애인 있으세요? 또는 결혼하셨어요? 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독신이냐고 묻는 사람은 처음이다.
가온이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삼선슬리퍼가 다시 물었다.
“독신주의?”
엉겁결에 네, 라고 대답은 했지만, 초면에 저런 걸 대뜸 물어보는 이 남자가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가온의 예감은 그의 다음 행동으로 확실해졌다.
삼선슬리퍼가 옆에 놓여 있던 서류 다발 중 하나를 가온에게 건넸다. 뭔지 모를 서류를 받아 첫 장을 보니, 큰 글씨로 설문조사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뭐냐는 뜻으로 쳐다봤다.
삼선슬리퍼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는 볼펜을 가온에게 건넸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길이 없는 가온은 볼펜을 받아 들고―왜 들었을까?―그를 쳐다봤다.
이번에도 삼선슬리퍼는 미소를 짓는다. 가온은 따라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저 미소로 홀리고 있다.
“설문조사예요. 집에 적합한지 알아보는.”
집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집에 맞는지 알아보는 조사라고?
지금까지 가온이 다닌 수많은 부동산은 생각하는 금액과 원하는 조건을 따졌지 조사를 하겠다고 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가온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고객님의 취향을 고려해서 적합한 집을 찾아드리는…… 일종의 서비스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이번엔 가온이 아! 라는 짧은 감탄사를 외치며 미소 지었다. 원하는 집을 꼼꼼하게 조사해서 찾아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삼선슬리퍼는 이해했으면 설문에 응하라는 듯 다시 홈쇼핑 책자를 보기 시작했다. 시선을 남자에게서 설문지로 옮겨가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여성 잡지에 멈췄다.
‘당신은 지금 자신과 이별할 때가 됐다’라는 문구가 크게 적힌, 가온이 칼럼을 기고하는 잡지다.
인터넷상으로 상담을 받거나, 잡지에 글을 올리거나 책을 출간하지만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을 직접 대면하면 알 수 없는 수줍음을 느꼈다. 아직까진 비판할지언정 비판받을 자신감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미용실이나 병원 아닌 곳에 여성 잡지가 놓여 있는 건 처음 봤다. 여기에 여직원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삼선슬리퍼가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곤 삼선슬리퍼의 시선은 또다시 알고 있다는 듯 미소로 바뀌었다.
예의 그 미소는 착각이 아니었던가, 설마 이 잡지를 봤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봤을 것 같진 않았다. 아무리 할 일이 없다고 해도 남자가 여성 잡지를 왜? 하며 호언장담했지만, 나중에야 이 잡지의 구매자가 누군지, 그 표정의 뜻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가온은 얼핏 보기에도 열 장 가까이 되는 설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 성별을 묻는다. 여자에 동그라미.
두 번째, 연령대.
10대, 20대, 30대, 40대를 묻는 문항에 30대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런데 연령대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밑에 정확한 나이를 묻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나이를 적으라고 할 것이지 왜 연령대를 묻는 건지 괜히 짜증이 났다. 앞에 숫자가 3으로 바뀌고 난 뒤부터 정확한 나이를 말하기가 꺼려졌다.
숫자 3을 적고서 망설이자 가온의 망설임을 눈치챈 삼선슬리퍼가 나이를 적으라고 거듭 말했다. 그 말에 가온의 안에 잠자고 있던 투덜이 스머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꼭 적어야 하나요? 연령대만 알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주위에 같은 나이와 지내면 친해질 수 있잖아요. 나이 많은 아저씨들보단.”
아저씨라는 말에 만취 상태면 항상 가온의 집 벨을 누르는 위층 아저씨가 생각났다. 그곳에 처음 살게 됐을 땐 늦은 새벽 갑자기 울려대는 벨 소리에 놀랐지만, 지금은 의연하게 아저씨를 위층까지 모셔가는 사이가 됐다. 그 덕에 백화점 상품권이 1년에 서너 번 생겼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생긴 원칙 중 하나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쉽게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아무 생각 없이 신상정보를 다 넘기냔 말이다.
가온 자신도 조사 차원에서 설문지를 만들어보기도 했고, 설문에 응한 적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상세한 설문지는 처음이었다.
설문지라는 것이 한 가지 측면, 영화관이면 영화관 자체에 대해, 화장품이면 화장품 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설문지는 가온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설마? 하고 뒤쪽 문항을 살펴보니 결혼 계획까지 적혀 있었다. 이 설문지는 집을 찾아주기 위한 조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마디로 신상털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드러내는 것이 싫어 요즘 누구나 한다는 SNS도 하지 않는 가온이었다. 집을 구하기 위해 이 짓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머리 복잡한 가온과는 달리 삼선슬리퍼는 홈쇼핑 책자를 사전 보듯이 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불신 가온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작자가 자신에 대해 무언가 알아낼 수 없게 그러나 심리테스트에 응하듯 신중하면서도 순식간에 체크를 해나갔다. 그러곤 탁! 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삼선슬리퍼가 보고 있던 책자를 덮으며 예의 그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그렇게 미소만 짓지 말고 말을 하라고, 말을!
결국, 가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집, 안 보여주세요?”
“아, 연락드리겠습니다.”
가온이 작성한 설문지를 분석한 뒤 적합한 곳을 알려주겠다며 전화번호까지 알아갔다. 그리고 가온에게 재차 확인했다.
“꼼꼼하게 작성하신 거 맞죠? 이건 심리테스트가 아니거든요, 살 집을 찾는 거지.”
“다, 당연하죠.”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가온은 인사를 하고 나오며 그를 돌아봤다. 문이 닫히기 전, 삼선슬리퍼가 다시 홈쇼핑 책을 드는 것이 보였다.
재우는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이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여성이었기에.
평범한 인상의 그 여자는 갑자기 부동산으로 들어왔고, 뜬금없이 간판을 재확인했고, 난데없이 빈방이 있냐고 물어 재우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부동산 관계자로 오해하는 이 여자에게 미소를 보내다 깨달았다. 이 여자가 조금 전 읽은 여성 잡지에 칼럼을 쓴 사람이라는 것을.
잡지에 섬네일 크기만 한 사진으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본다는 것이 더 대단한 일이겠지만, 사진 속 그녀는 눈앞에 있는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는 화려한―섹시란 이런 것이다 명확히 보여주는―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미간의 주름을 잡고 서 있는 이 여자는 캐주얼 차림의 평범한, 보통의 여성이었다.
재우는 홈쇼핑 책자를 펼쳤지만 모든 신경은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는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라서가 아니다.
예전에도 이런 상상을 가끔 한 적이 있었다. 연예인처럼 본인만 알고 있는 상대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지금은 추하게 힐끔거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 눈이 마주칠 때 그 민망함이란. 그렇다고 대놓고 볼 수도 없다. 그러면 진심이 드러날 수 있으니깐.
진심이 뭘까?
아니, 애초부터 이 여자에게 감정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치졸한 문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 여자를 처음 본 건 자선 전시회 일정을 확인차 방문한 모교에서였다.
일찍 도착한 재우는 캠퍼스를 거닐다 연애특강이라는 안내판을 보게 됐다. 연애특강이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남녀의 만남을 강의로 배운다는 건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다. ‘부부생활이란’ 정도의 특강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다.
재우는 순전히 호기심에 강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그 안에는 어림짐작 팔십 명 정도 되는 남녀 대학생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 그 학생들은 강사의 말에 집중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강사가 웃음을 유발할 말을 한 모양이다.
재우는 빈자리를 찾아 앉으며 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강의는 끝났고 질의응답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강사는 학생들에게 미리 받은 질문지를 하나 골라 읽었다.
“여기에 눈에 띄는 질문이 하나 있네요. 여자친구가 제 말보다는 친구 말만 믿어요.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사의 질문에 뭔가 수긍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보였고, 혹시 네가 쓴 거 아니냐는 듯 옆에 남자친구를 찌르는 여자들도 있었다.
“다들 경험 있으실 거예요. 남자친구가 집에 가서 잔다고 해놓고 친구들이랑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 술자리에 여자도 있었다.”
이 말에 한두 번은 다 겪어봤다는 듯 끄덕이는 사람들.
“이 상황이 반복되면 여자들은 친구들에게 상담을 하게 되죠. 왜 그런지 아세요?”
어떤 남자가 손을 들자 강사가 지목했다.
“남 욕 안 하면 시간 때울 게 없잖아요?”
이 남자의 대답에 여자들의 야유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맞아요. 욕이죠. 욕하려고 친구에게 말하는 거 맞습니다.”
의외의 대답을 하는 강사에 재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화병이 안 생기거든요. 우리나라만 있는 화병이 왜 생긴다고 생각하세요? 할 말 못 해서 생겨요. 허구한 날 거짓말하는 남자친구한테 말해봤자 울화통만 터지니,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누군가에게 말해야겠죠. 그런데 이 질문엔 친구 말만 믿는다, 라고 하는 부분이 핵심이에요. 그렇다면 그렇게 된 시점을 생각해 보세요. 처음부터 본인의 말을 안 들었는지. 분명 그렇게 된 계기가 있을 겁니다. 어때요? 생각나셨나요?”
강사가 질문한 사람을 찾는 듯 질문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자신이 썼다고 대답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짐작되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재우는 다른 질문지로 넘어가려는 강사를 보며 질문 있다고 말하면서 손을 들었다. 강사의 시선을 따라 모두들 재우에게 시선이 향했다.
재우는 강사가 질문하라는 손짓을 하자, 손을 내리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무리 남자가 계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여자가 전혀 믿지 않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재우의 이 질문에 알 수 없는 적막감이 흘렀다. 강의의 흐름을 깨는 행위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재우가 뒷문을 통해 들어갔을 때 강사와 눈이 마주쳤었다. 원래 강의를 신청한 사람만 들을 수 있었지만, 거의 끝나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강사는 재우를 보고도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그런데 그의 질문 때문인지 후회의 빛이 강사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덤덤한 표정의 재우와는 달리 강사는 의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죠.”
재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강사가 답답하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문제가 되는 건, 여자에게 잃어버린 신용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없이 왜 못 믿냐며 싸우는 일이 반복됐을 때에요. 그러면 다음 수순은 이별이 되는 거죠. 반대로 안 될 수 있다고 하는 건 이 고비를 넘기고 남자가 노력하는 만큼 여자도 같이 노력했을 때예요.”
강사는 이젠 이해가 됐냐는 듯 재우를 바라봤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강사는 다음 질문지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재우가 또다시 질문을 던지며 강사를 막았다.
“여자가 상대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요? 그런 경우도 있지 않나?”
재우는 자신의 말 때문에 적막감에서 냉랭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말이 강사에게 딴죽을 건 것으로 보인 게 분명했다. 자신이 왜 강사의 말에 화를 내고 있는지 대화를 나누면서 서서히 깨닫게 됐다. 지난 이별로 자신이 아직도 화가 나 있음을.
강사는 뭔가를 생각하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 들으려고 한다는 건, 아직 화가 났다는 거죠. 그럴 땐 상대마다 달라요. 화를 풀어줘야 하는 타입이 있고,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타입이 있고.”
다시 한번 강사는 재우의 반응을 기다리다 시선을 거뒀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우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애인보다 친구 말만 믿는 건 그런 계기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애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이별 통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강사는 재우는 바라보다 더욱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이별 통보받으셨어요?”
이 말에 안쓰러운 표정과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이 뒤섞여 다들 재우를 바라봤다.
재우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시작한 건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강사를 바라봤다.
강사는 대답을 안 하겠다면 넘어가겠다는 듯 어깨를 살짝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미 몇 번의 이별 예감을 당사자는 못 느낀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이 말에 재우는 충격 아닌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강사를 응시했다.
“나 사랑해? 얼마나? ……이렇게 묻는 말에 남성분들이 뭘 자꾸 확인하려 하냐고 짜증을 내죠. 그런데 여자는 확인을 받기 원해요. 그 한마디에 행복감을 느끼죠.”
강사는 더 이상 재우가 질문을 하지 않자 강의를 진행했다.
재우는 나 사랑해? 얼마큼? 이라고 말하던 전 여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열중하고 있는 재우 옆에 턱을 괴고 앉아 자신에게 질문하던 여자친구.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무리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랑해. 많이, 라고 영혼 없는 대답을 했을 거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일할 땐 솔직히 옆에서 그러는 여자친구가 성가셨으니깐. 결국,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던 건가? 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재우가 앉아 있는 의자를 치며 지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강의가 끝난 뒤였다.
강사가 앞문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재우는 멍하니 앉아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그 강사가 지금 눈앞에 앉아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는 이 여자다.
재우는 이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에게 모욕감 아닌 모욕감을 줬으면서 어떻게 기억을 못 하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헤어졌냐는 질문으로 강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사건은 강의실에서가 아니라 전시회 때 일어났다.
전시회를 진행하던 중 몇몇 학생이 재우를 알아봤다. 쑥덕거림이 느껴졌고,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냥 혼자 하는 오해라고, 착각이라 여겼지만…… 혼자만의 오해가 아님이 교수님들과 함께하는 회식 자리에서 확인되었다.
전시회 주관자이시자 자신을 가르치셨던 교수님께서 농담거리 삼아 재우에게 말을 던졌다.
“재우, 너 여자한테 차였다며?”
“네?”
“뭘 어떻게 했기에 통보만 받아. 좀 잘하지. 여자는 말이야, 식물 같은 존재야. 항상 관심을 두고 물을 주고 햇볕도 비춰주고…….”
재우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일행 중 한 명이 교수에게 식물에 물 주러 일찍 들어가셔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우리 집은 선인장이라 괜찮네.”
이런 말을 하고는 교수는 일행들과 함께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나 재우는 웃지 못했다. 표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재우였지만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재우는 영화 ‘달콤한 인생’에 나온 대사처럼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이 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런 일로 남자가 뒤끝 작렬이라고 한다 해도 거둘 생각이 전혀 없다. 그 강의 후에 알게 된 여러 사실이 그를 그렇게 적대시하게 만들었고,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기획 특집으로 미술에 대한 글을 잡지에 기고할 때였다. 기고한 잡지에서 우연히 강사의 사진을 발견했고,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됐고, 이 사람의 글을 보게 됐다. 강의 시간에도 그렇듯, 이 사람의 글을 읽으면 왜 자꾸 반발심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우선은…… 그냥?
재우는 설문지를 작성한 가온에게 연락 주겠다며 돌려보냈다. 전화 연락을 다시 할 생각 따윈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출근길에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형식적인 대답을 했을 뿐이다. 상처 아닌 상처를 준 이 사람에게 집 같은 걸 소개할 생각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랬던 재우가 가온이 작성한 설문지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누가 봐도 대충 설문지를 작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좋아하는 음악이 헤비메탈이라면서 작성한 노래 제목은 록이었다. 록 음악과 헤비메탈을 구별 못 하는 이 여자, 성실하지 않다.
재우는 평소에 자신은 설문지 자체에 응하지 않으면서 그녀는 성실하지 않다고 단정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온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심한 복수가 어떤 일을 초래할지 상상하지 못한 재우는 그녀가 원하는 집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먹잇감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은 재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부자복덕방을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가온은 집 근처 커피숍에서 칼럼을 쓰고 있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방을 구하러 다니느라 밀린 일을 하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택배인가 싶어 받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 전화였다.
[집, 구하셨어요?]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바람에 어리둥절했다.
“어디세요?”
발품 팔았던 부동산에서 가격을 낮춰준다는 전화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연락처를 남기고 돌아온 곳이 한두 곳이 아닌지라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가온 씨 아니세요?]
질문에 질문을 하는 이 사람, 낯설지가 않다.
“맞는데…… 누구세요?”
[부자복덕방.]
복덕방이라는 말에,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삼선슬리퍼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락을 기다리던 다른 부동산이 아닌, 집을 본 적도 없는 이곳에서 전화가 오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보러 지금 오실래요, 라는 말에 문자로 주소를 받아 찾아가기로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깐.
지하철역에서 만나자는 걸 싫다고 한 뒤, 주소지로 찾아가면서 바로 후회를 했다. 큰길과 달리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담벼락이 높은 집들이 즐비했다. 한남동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집들이었다.
가온은 주소에 찍혀 있는 로열맨션을 봤을 땐 다 쓰러져 가는 빌라에 이름을 그렇게 붙여놨을 거라 무시했었다. 그런데 이 위화감이란. 위화감은 서서히 기대감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이내 사그라졌다.
날씨가 좋은 것도 이럴 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온은 모르는 길을 계속 걸어가며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가자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길 찾기 어플이 같은 자리만 맴돌게 했다. 지도를 따라가면 막다른 골목이 자꾸 나와 짜증이 났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려 했지만, 주택가인데도 걸어 다니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었다.
그땐 왜 삼선슬리퍼에게 전화해서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한 가지 생각에 꽂히면 그것만 생각하는 나쁜 습관이 가온을 또 이렇게 개고생을 시켰다.
어렵사리 찾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도움으로 너무나 쉽게 언덕 위에 있는 로열맨션을 찾을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길 찾기 어플은 제대로 알려주긴 했다. 막다른 골목 뒤가 그녀가 찾던 곳이었으니, 벽을 뚫고 갔다면 바로 도착했을 것이다.
가온은 점점 가까워지는 로열맨션을 직접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름만이 아닌 정말 이름처럼 고급스러웠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움직이며 사방에서 찍고 있는 CCTV의 위엄이란. 가온은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보안 시스템에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번뜩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설문조사에 보안 시스템 최상이라는 항목에 체크했던 기억이.
다시 맨션을 살펴보며 자신이 체크했던 문항들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그때, 오늘은 흰 면 티셔츠에 스키니 진을 입은 삼선슬리퍼가 다가왔다. 오늘 신은 삼선슬리퍼는 복덕방에서 본 삼선슬리퍼와는 다른 색상이었다. 그날은 금색과 흰색 줄무늬였다면 오늘은 검정과 흰색이 교차하고 있었다. 같은 디자인에 다른 색상이라니, 삼선슬리퍼를 유달리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복덕방에 앉아 있을 땐 몰랐지만 이 남자 생각보다 키가 컸다.
가온은 인정해야 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로 스타일이 사는 삼선슬리퍼, 넌 뭘 입어도 스타일 사는 모델 체형이구나.
멍하니 그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을 때 예의 미소를 지으며 삼선슬리퍼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은은한 페퍼민트 향이 났다. 생각지 못한 향이 가온의 후각을 자극했다. 어떤 향수를 쓰는지 궁금했다.
가온은 삼선슬리퍼가 반가웠지만 새침하고 도도하게 고개만 살짝 숙였다.
“여기 맞아요?”
“들어가시죠.”
또다. 묻는 말에 정확하게 대답을 하는 법이 없는 삼선슬리퍼.
‘너 자꾸 이러면 짜증 낸다.’
그러면서도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이런 집이 얼마인지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월세조차 얻을 능력이 되지 않으니깐.
가온은 모델하우스 구경하는 느낌으로 기분 좋게 들어갔다. 보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그만이니깐. 하지만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겠어!
보안 카드키를 대자 문이 열리며 대리석 바닥으로 장식된 로비가 보였다. 중세 시대에서나 본 듯한 높은 천장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어색하게 삼선슬리퍼를 따라 5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삼선슬리퍼의 뒤태를 감상하는 여유도 보였다. 집 안에 들어가기 전까진.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