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은 한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는 산문 문체로,
대개 가계, 행적, 논찬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행적은 작가의 창작 의식에 따라 취사선택되기 마련이고,
논찬 역시 작가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의 작가와 대상 인물은
시대를 초월하여 교감하게 되는 것이며,
전이 작가 의식이 반영된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1부 신념을 지키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난적(亂賊)이 왜적의 세력을 끼고 국모(國母,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임금을 욕보였다. 이에 항거해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춘천의 선비 유중락(柳重洛, 1842~1922)이 의병을 일으키자 김경달이 포수로 그의 부대에 예속되었다. 여러 군의 의병
부대에서 적당을 맞아 싸웠는데, 양근(楊根)에서 패배하여 의병이 모두 흩어지고 김경달만 홀로 우뚝 서서 총을 쏘았다. 적병이 그를 체포하여 가평읍(加平邑)으로 데려가서 포박한 끈을 풀어 주며 회유하였다.
“우리에게 항복하여 함께 일을 하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김경달이 적을 크게 꾸짖으며 말하였다.
“나는 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고 중화를 도와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난적을 없애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나는 당당하게 의리를 지킬 것이다. 어찌 너희들에게 붙어서 살기를 도모하겠느냐.”
적들이 재차 회유하여도 듣지 않았고, 공포탄을 쏘아 가며 세 번 회유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김경달이 적을 더욱 사납게 꾸짖자, 비로소 그를 총살하였다.
-『의암집(毅菴集)』 권50
김경달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도 아니요, 경사(經史)를 공부한 선비도 아니다. 소위 배운 것 많고 가진 것 많은 조정의 대신과 학사 들은 이처럼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인데도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뿐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개화파가 옳으니 위정척사파가 옳으니 하는 역사적 평가를 떠나, 자신의 신념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충의지사(忠義之士) 김경달에게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 유인석의 글을 통해 촌에 사는 무지렁이 백성 김경달의 이름과 의로운 행적을 알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의병 김경달」 중에서
3부 방외인으로 살다
창해선생(滄海先生)은 성이 정(鄭)이고 이름은 아무개이며 자(字)는 아무개이고 자호(自號)는 창해이다. ‘창해선생’은 나라의 아이들이나 하인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선생은 용모가 마르고 특이하여 남들과 달랐다. 성격은 뻣뻣하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앉기를 좋아하는 등 예법에 구속되지 않았다. 문예를 일찍 성취하였으나 머리를 굽히고 과거 공부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약관에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문장의 대지(大旨)를 깨쳤다. 그러다가 이렇게 탄식하였다.
“대장부가 조선 땅에 태어나 비록 사마천처럼 천하를 유람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명산대천을 남김없이 유람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고는 노새 한 마리를 마련하여 쓸쓸히 혼자 길을 떠났다.
-『치암집(癡庵集)』 권9
정란의 산수 유람은 보통의 사대부와는 다르다. 대개 사대부는 젊은 날 과거 공부를 하는 여가에, 벼슬에 나갔다가 잠시 물러나 있을 때, 혹 지방관으로 갔을 때 산수를 유람하였다. 이는
심신의 휴식을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란은 한평생을 오직 산수 유람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그가 유람한 곳은 명승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북쪽의 백두산부터 남쪽의 한라산까
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정란은 쉰이 넘은 나이에 백두산과 한라산을 등반하였는데, 이는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채제공이 정란을 두고 “천하 만물 어떠한
것도 그 즐거움과 바꿀 수 없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정란은 산수 유람에 미친 사람이었다.
-「여행가 정란」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