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은 독자가 뒤팽의 덫을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뒤팽은 어둠 속에서 생각하지만 라캉을 따르는 자들은 밝은 대낮에도 문제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포의 작품 제목을 보기만 해도 그 점은 분명하다는 거죠. 편지를 보낸 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다시 받습니다. ‘purloined letter,’ 곧 ‘지연된en souffrance 편지’라는 제목은 편지가 항상 그 목적지에 도달함을 알려주죠. 그래서 ‘잃어버린 편지’는 라캉의 해석이나 정신분석을 통해서 제자리를 찾고 그 숨겨진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냅니다.
지연된 편지, 지연된 의미는 바로 기표가 걸어가는 길이죠. 주체들은 그것이 우회한다고 생각하지만, 기표는 그렇게 다른 기표들을 가리키면서만 자리 자리를 마련하죠(라캉은 이것을 한 기표가 다른 기표로 대체되면서 사슬을 만드는 환유로 설명하죠). --- pp.75~76 「1장 '주체들을 길들이는 기표, 뒤팽도 벗어나지 못한 기표의 질서'」중에서
따라서 데리다는 법의 진리가 비-진리, 진리 없는 지리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법은 법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맹목적인 지킴이가 지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설적입니다. 따라서 문지기가 법을 지키고 법이 어떤 본질을 지닌 것으로서 그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편견’이 ‘법-앞에서’ 마련되죠(문지기는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법이 없음을 은폐하려고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부재의 지킴이가 법의 권위를 만들고 법의 현존에 대한 일정한 기대와 욕망을 만듭니다).
법 ‘앞’에 있는 우리는 법 ‘바깥’에 있으므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법은 우리에게 나중에 출입을 허락한다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 붙잡아둡니다. 항상 열려 있는 문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를 법 앞에서 기다리게 합니다. 우리는 법의 이름, 이미지, 기표와 그 효과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지요. --- p.112 「2장 '다가갈 수 없는 법/텍스트 앞에서'」중에서
이처럼 궁핍한 시대는 존재가 물러서는 시기, 즉 신들이 퇴각한 시기와 아직 오지 않은 시기로서, 이 두 시기 ‘사이’에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두 ‘사이’ 가운데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위대한 약속은 물러났지만, 다른 약속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고’ 또 ‘오는’ 그 사이에 있는 ‘사이-존재’입니다. 앞서 얘기했던 존재의 한가운데가 ‘사이’에 있다고 한 것을, 이제는 시간의 한가운데로 바꿀 수 있습니다. 곧 이 사이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이행 지점을 뜻합니다. 따라서 비-존재와 일시적인 것의 흐름에 맞서는 생성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이’는 잠정적이고 흘러가는 영역을 가로질러서 지속하는 것을 세웁니다.
이처럼 가난한 시대에서 하이데거와 횔덜린은 새로운 사고, 새로운 시작, 새로운 역사를 찾습니다. 시인은 대지에서 시인답게 살면서 시의 언어로 ‘지속하는 것’을 세우려고 하고, 이를 따르는 사상가는 사고할 수 없는 존재를 사고할 언어로 ‘존재의 집’을 세우려고 합니다. --- pp.148~149 「3장 '시인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중에서
플라톤은 사랑관계에 ‘진리 문제’를 근본적인 것으로 도입하므로 사랑하는 자의 임무는 그를 사로잡는 ‘사랑의 본질을 아는 것’이 됩니다. 그가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답한다면, 개인이 추구하는 바가 자신의 다른 반쪽이 아니고 진리에 접근하려는 것이라고 할 겁니다. 사랑의 주제는 사랑에 숨어 있는 진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되죠.
또한 소크라테스의 연애술은 사랑받는 자의 저항과 사랑하는 자의 혜택 베풀기가 균형을 이루는 데 관심을 갖지 않죠. 문제는 사랑하는 자의 에로스가 참된 것과 관계를 맺느냐이니까요. 따라서 이 연애술은 명예와 불명예라는 구분 대신에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되찾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즉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는 방식 대신에 ‘주체의 금욕’과 함께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초점으로 삼죠. --- pp.224~225「4장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중에서
그가 볼 때, 플라톤에서부터 인식은 항상 사냥이었고, ‘안다’는 것은 ‘사냥감을 죽이는’ 것이다. 양을 죽이는 늑대나, 자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는 인간 이성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인식은 군사적인 인식이었고, 나아가 군사적 기술이 된다. 단순한 게임을 넘어선 전쟁 전략이다. 이렇다면 인식 이론은 결코 순박하거나 무고하지 않다. 한마디로 ‘아는 것은 죽이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가 도구적 이성이라고 표현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뜻을 갖는다. 내가 모든 것을 쮾 때, 나에게 알려진 모든 대상은 내 것이 될 수 있고, 그런 대상은 그 나름의 자립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바로 게임 공간에서 늑대가 사용했던 전략, 스스로의 힘을 최소화하면서 (가상적인) 위협적인 힘을 자기의 상류에 위치시켰던 방식을 쓴다. 나는 게임 공간의 순서관계에서 중간에 자리 잡는데, 항상 승리하는 양의 보호견과 실패한 악마나 감각적인 세계 사이에 있다. 여기에서 늑대-인간이 원하는 순서관계{강자-양의 보호견>나>실패한 악마, 감각적 세계}가 마련된다. 이 늑대는 이기는 위치, 곧 진리의 장소에 있다. ‘가장 강한 자의 이성’은 홀로 자립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세르는 서구적 인간, 서구의 과학적 이성이 과학으로 무장한 늑대라고 지적한다. --- p.294 「6장 '늑대의 전략, 데카르트의 진리 게임'」중에서
근대인은 영웅 신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근대인은 시련을 유보한 채 죽을 때까지 신참자로 남는다. 반성적 지성을 발전시키고 상징체계의 스핑크스를 물리치는 방식으로 우회함으로써 의식을 무의식과 떼어낸다. 오이디푸스는 역사 없는 사회, 곧 세대에서 세대로 전통을 반복적으로 전승하는 사회에서 의미를 갖는다. 근대에 이르러 선조들의 지혜는 더 이상 주체들을 안내하지 않고 모두가 오이디푸스적인 용기와 혼란에 내몰린다. 역사를 통해서 반복을 깨뜨린 사회, 진보, 영속적 혁신을 겪는 사회는 오이디푸스적이다. 이렇게 볼 때 서구인에게 오이디푸스 신화는 허구가 아니다. 그들은 개방되고 전통을 벗어난 사회에서 스스로를 목적으로 여기는 주체들이다. 휴머니즘과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틀에서 자기 생산이 주체를 구성하는 한 오이디푸스는 바로 서구인의 운명이 된다.
--- pp.382~383 「7장 '지혜의 그림자와 어두움의 지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