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의 증상에 대해 ‘적면공포증’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러나 과연 그 청년은 그 이름을 들은 타인이 자신이 겪는 일을 ‘알아준다’고 생각할까. ‘안다’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적면공포증이라고 이름 붙이는 행위는, 이 사람이 하나의 신경증을 가지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겪은 고통까지 알 수는 없다. 공감이 바탕이 된 앎을 위해서는 이름만 알아서는 안 된다. (제1장 「민담과 마음의 구조」, 17쪽)
현대인은 합리성과 도덕성 따위로 지나치게 자신을 방어하는 탓에 두려움에 떠는 일이 거의 없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모르는 것이나 무서운 것은 적절하게 바꿔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한다. 죽음에 대한 현대인의 자세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한 한 죽음을 잊으려고 한다. 의학이라는 훌륭한 수단으로 병을 몰아냈으니 최대한 장수할 수 있다고 믿는다. [……] 그럼에도 죽음은 엄연히 존재한다. 트루데 부인 이야기는 죽음을 잊으려는 이들에게 새삼스레 인생의 전율을 체험하게 한다. (제2장 「그레이트 마더」, 35쪽)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 집은 마음씨 고약한 마녀가 아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처음에 가족이 함께 살던 집에 닥친 기근 상태와 마녀가 사는 집의 풍요로운 먹을거리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마녀가 준비한 달콤하고 풍성한 과자는 어머니의 과보호를 연상시킨다. 과보호는 아이들의 자립을 방해한다. 헨젤과 그레텔은 단기간에 극단적인 거부(숲에 버려지는)와 과보호를 체험한다. 이러한 거부와 과보호는 결과적으로 같은 것이다. (제3장 「어머니로부터의 독립」, 68쪽)
「게으른 세 아들」의 도입부에는 임금님과 세 아들이 등장한다. 왕비는 등장하지 않는다. 즉, 남성들만의 세계이며 여성은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서로 대립되는 수많은 원리가 작용하는데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도 그중 하나다. [……] 그럼 이 이야기에서 왕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남성 원리에 의해서만 유지되던 왕국의 규범성에 위기가 닥쳤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제까지 왕국을 유지해왔던 최고의 원리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이 도입되어야만 진정한 갱신이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4장 「게으름과 창조」, 92~93쪽)
이 이야기에서는 숫자 ‘2’가 무척이나 강조된다. 제목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동물들도 두 마리씩 등장한다. 융은 2의 상징성에 관해 중세 철학자의 생각을 접목시켜 인간의 최초의 수는 1이 아니라 오히려 2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즉, 1이 1인 한 우리는 ‘숫자’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전체적인 것에서 분할이 생겨 거기에 대립 혹은 병치되는 ‘2’의 의식이 발생해야만 ‘1’의 개념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2는 분할과 대립을 가정하기 때문에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러한 의미에서 2는 그림자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숫자다. 정립과 반정립, 이 역동성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제5장 「그림자의 자각」, 113~14쪽)
왕은 사과를 도둑맞은 사실을 알고 아들들에게 사과를 지키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인 셋째 왕자가 등장하는데, 아버지는 이 아들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이본 「하얀 비둘기」에서는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막내아들을 ‘멍청이’라 부른다. 가장 열등한 존재가 최고의 존재로 이어진다는 역설은 민담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이는 기존 체제의 눈으로 보는 한, 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존재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 없고 열등한 기능이 인격을 바꿔나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8장 「아버지와 아들」, 179쪽)
공주의 잠시 동안의 행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무스라면, 공주를 달래고 야단치며 다음 일을 찾게 하는 것도 아니무스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둘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던 공주는 새로운 다음 일을 향해 간다. 공주님에서 끝내 부엌데기로까지 추락하는 것이다. [……] 불도 못 피우던 결혼할 당시와 견주면 그녀는 무척이나 강해졌다. 공주 신분으로 살던 생활에 비하면 남이 먹다 남긴 것을 얻어먹는 처지이니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생각해보면 남이 베풀어주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게 구도자의 특권이기도 하다. 공주의 외적인 추락에 반비례하여 내적인 구도 과정은 정상에 다다르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제10장 「여성 마음속의 남성」, 234쪽)
쥐는 밤이 되면 나타나 몰래 숨어서 소리를 내거나 무엇인가를 갉아 먹으며 우리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콤플렉스의 작용을 표현하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움직임이 종종 성적인 색채를 띤다는 점에서, 쥐의 움직임은 성적 공상의 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 멍청이는 커다란 두꺼비의 명령으로 작은 두꺼비를 집어 쥐가 끄는 수레에 태워주는데, 이는 아름다운 아니마상이 본디 어머니상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제11장 「자기실현 과정」,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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