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메시지, 창조와 구원과 해방의 놀라운 이야기가 우리 일상의 삶이라는 소박한 질그릇에 맡겨졌습니다(고후 4장).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이 바로 좋은 소식을 담은 그릇입니다. 우리는 모두 금이 간 단지들입니다. 물이 새는 단지들이지요. 이는 복을 흘러 나가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우리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신앙생활에 관한 모든 것은 실제로 살아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어떤 개념을 경험으로 옮길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추상적 개념은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로막는 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둔 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정말 잘 통합된, 일관성 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으깬 감자 요리를 만들어 가족에게 대접했던 그분은 일요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 교인들에게 대접했던 바로 그 목사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지를 몸으로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몸은 거룩한 성전이었고, 거룩한 분이 사시는 거처였으며, 하나님의 영을 담은 그릇이었습니다. 내가 참말을 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아버지에게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난 만큼 그 증거가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담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런 은사들을 담은 흠 있는 금간 그릇, 결코 그냥 저장해 두지 않고 늘 새는 그런 그릇이었습니다. 얼마나 거룩한 단지였는지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합니다.
나아가, 그의 많은 책들은 우리를 위해 쓴 글을 담은 튼튼한 그릇이었습니다. 진리와 은혜가 가득한 영감 받은 글. 우리가 오랫동안 귀하게 여길 그런 글들 말입니다.”
--- 「추모의 글」중에서
“우리 모두 단조로운 도덕적 습관에서 깨어나고, 그저 하잘것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을 필요가 있다. 내게는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내게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이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나온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탁월함을 추구하도록 자극받고 그 길로 인도되어 왔다.”
--- 본문 중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형편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악하게 산다기보다는 허망하게 살아가는 모습 말이다. 비참하게 산다기보다는 미련하게 사는 모습. 우리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을 보면 흠모할 만한 면이 거의 없고 본받을 점은 더더욱 없다. 주변에 유명 인사들은 있으나 성인saint은 전무한 형편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불면증 환자처럼 지루함이란 질병에 걸린 전 국민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애쓴다. 악명 높은 범죄자들이 겁먹은 순응주의자들의 공격성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성격 나쁜 유별난 운동선수들이 게으르고 냉담한 구경꾼을 대신해서 경기를 치른다. 아무런 목표도 없고 싫증 난 이들이 하잘것없는 소일거리와 쓰레기 같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선한 일을 위한 모험이나 의로운 것을 추구하는 행위, 그 어느 것도 주요 뉴스거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 p.23
“성경이 지닌 이 같은 양면적 특징?탁월성을 향해 열정을 품도록 촉구하는 역량과 더불어 이른바 인간의 성취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은 특히 예레미야서를 대할 때 강력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클렌스 브룩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즉 한갓 사물처럼 표류하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 있는 도덕적 존재로 행동하기 위해서 인간의 형상을 찾고 있다.’
내게는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인간의 형상’ 곧 탁월성이 구현된 인생이다. 이는 그리스인이 ‘아레테’라고 불렀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그 탁월성이 믿음의 삶에서, 자아보다 하나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하고, 어떤 위로나 존경 혹은 업적과는 거의 상관없음이 분명하다. 한결같은 삶을 살았으나, 그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적인 교만이나 출세 의식 혹은 개인적 성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예레미야는 내게 충만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자기 자랑, 자기만족, 자아 수양을 통하여 그렇게 되려는 시도는 철저히 봉쇄한다.”
--- p.28
“나의 자만심과 교만을 자극하는 일 없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탁월성을 갈구하는 욕망을 자극하되, 어떻게 하면 걸림돌이 되는 자를 팔꿈치로 밀쳐 내려는 이기적 속성을 부추기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수많은 목소리들이 저마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길을 제시한다고 야단이다. 물론 나는 그런 격려의 목소리를 환영한다. 하지만 그런 격려에 수반되는 권고가 계속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주고 있기에, 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 그 권고란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써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백만의 불행에 빠진 사람들에게 제시되어 온 처방책이었다.
이런 문제와 관련된 성경의 권고는 아주 분명하다.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하게끔 인도하되 그것을 마치 형편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로 오해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탁월성 면에서 자라 가고 이타적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되 자기를 잃어버리는 동시에 자기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목회 기술이다. 이것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야말로 그것을 이룩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본보기다. 즉 자기 계발이 완전히 이루어진 동시에(그래서 무진장 매력적인) 완전히 이타적인 인물(그래서 분별력 있는 지혜를 갖춘)이다. 대화와 강의, 수련회와 설교 등 여러 면에서 예레미야는 지난 25년 동안 내게 훌륭한 모범이요 멘토였다.”
--- p.30
“최상의 삶을 추구함?
우리는 우리를 개미집 수준으로 격하시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끌어 모으고 소비하는 일에 허둥거리도록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에 반격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필수다.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반작용의 대명사다. 성숙하고 강인한, 잘 계발된 인물이자 믿음으로 산 사람이다. 여기서 나는 예레미야서에서 전기에 해당하는 부분을 골라내 오늘날 일상생활의 맥락에 비추어 개인적으로 그리고 목회적으로 묵상하고자 한다. 예레미야의 생애는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그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설명하려고 할 때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 중 하나가 예레미야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마 16:14). 나는 경건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묵상하는 마음으로 이 성경 본문들을 정독함으로써, 최상의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하게끔 자극을 주고 싶다. 우리 중 누구든지 최상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에 의거한 삶이라는 신선한 문헌 증거를 제공하고 싶다. 우리 모두 단조로운 도덕적 습관에서 깨어나고, 그저 하잘것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을 필요가 있다. 내게는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내게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이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나온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탁월성을 추구하도록 자극을 받고 그 길로 인도되었다.”
--- p.31
“예레미야야, 그래 인생은 고해苦海와 같단다. 그래서 방해하는 첫 파도가 몰아칠 때 아예 기권하려는 것이니? 인생에는 하루 세 끼 식사와 밤에 잠자리를 구하는 것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알게 되자 뒤로 물러갈 작정이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자기 신변의 안전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을 보는 순간 집으로 뛰어갈 생각이냐? 너는 조심조심 살 생각이냐, 용감하게 살 생각이냐? 나는 너를 최상의 삶을 살고, 의를 추구하고, 탁월성을 향해 계속 전진하라고 불렀다. 그래, 오히려 신경과민에 걸리는 편이 더 쉽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기생충처럼 사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것, 보통 사람처럼 느긋하게 사는 편이 더 쉽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더 쉬운 건 사실이지만 더 나은 삶은 아니야. 더 수월하긴 하지만 더 뜻 깊은 삶은 아니지. 더 쉽긴 하지만 더 보람 있는 삶은 아니란다.
나는 네가 스스로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목적을 가진 삶을 살라고 너를 불렀고, 네 소명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니. 그런데 이제 첫 번째 난관이 보이자마자 그만두려고 하다니. 이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미지근하고 냉담한 군중과 경쟁하다가 피곤에 지쳐 나가떨어지면 도대체 진짜 경주가 시작되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날렵하고 승부욕이 강한 탁월한 말들과 경주하는 것 말이다. 예레미야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이런 군중과 함께 발을 질질 끌면서 걷고 싶으냐, 아니면 말들과 함께 힘차게 경주하고 싶으냐?
물론 탁월성으로부터의 후퇴, 위험 부담에서의 회피, 믿음의 퇴보등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최소한으로(“깃털 없는 두 발 동물”) 정의하여 그 한도 내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이 자신을 최대한으로(“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정의하며 모험적으로 사는 것보다 더 쉬운 법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질문에 예레미야가 자진해서 혹은 재빨리 대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세상의 냉소주의는 새로운 삶을 향한 희열에 찬 이상에 흙탕물을 튀겨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 젊은 시절의 열광적인 기운은 더 이상 그를 끌고 갈 수 없었다. 그는 선택 가능한 대안들을 저울질해 보았다. 비용도 계산해 보았다. 망설이면서 이리저리 궁리도 해 보았다. 드디어 찾은 대답은 단순히 말로 하는 답변이 아니라 한 인생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삶이 바로 그의 대답이 되었다. “말들과 함께 달리겠습니다.”
--- 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