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문화권의 이상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는 군자(君子)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대나무가 갖는 의미는 자못 크다. 대나무는 또한 은일(隱逸)이나 효행(孝行), 부녀자의 절조(節操), 길상(吉祥) 등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어 학자들에게 주요한 연구 소재가 되어왔다. 이러한 대나무를 화재(畵材)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당대 말엽부터이다. 그 뒤 여러 화가들에 의해 이론적, 기법적인 기틀이 확고히 다져지면서 문인화를 대표하는 화목으로 인식되었다. 우리나라 묵죽화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화원화가들을 중심으로 북송대의 사실적인 화조화풍에 영향을 받았으며 소식(蘇軾, 소동파)과 문동(文同)에 의한 문인 묵죽화풍이 크게 유행했다.
조선 초기에는 묵죽화가 성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자료나 현전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 몇몇 문헌자료와 청화백자 등 그 자료가 미비하지만, 조선 중기 묵죽화풍을 예시하고 그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 중기는 역사적으로 참으로 많은 혼돈과 불안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치, 사상,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새롭고 다양한 변화들이 진행된 역동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문인화가들 뿐만 아니라 화원화가들까지도 묵죽를 주요 화재로 사용하였는데, 두 차례의 국란을 통해 고난과 혼돈의 시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묵죽의 대나무가 갖는 절개와 지조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덕목이자 문인들이 공감하는 절박한 정서였기에 가능했다. 중기 최고의 묵죽화가는 단연 탄은 이정이다. 이정의 묵죽화는 그 뒤를 이은 중기 묵죽화가인 이징, 김세록, 허목, 이급뿐만 아니라 그 후 조선시대 묵죽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는 성리학을 주창한 율곡계를 비롯한 사대부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회화계는 정선, 오영석 등에 의해 진경산수화가 크게 유행하였으나 유덕장, 심사정, 강세황 등의 문인화가들과 최북, 김홍도, 임희지 등의 화원?여항화가들에 의해 묵죽화 역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유덕장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묵죽화가라 할 수 있는데 초기 이정의 묵죽화풍을 받아들였으나 차츰 자가 화풍을 이룩해 쇠잔해져가는 묵죽화의 명맥을 부흥시켜 심사정이나 강세황에게 계승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유덕장의 묵죽화풍을 이어 받은 심사정과 강세황은 남종문인화풍을 수용하고 『개자원화전』이나 『십죽재화보』 등의 명?청대 화보를 적극 활용하여 자기화시켰다. 후기 감성적인 화원화가와 여항화가의 묵죽화들에게도 남종문인화풍이 폭넓게 확산되었다. 이는 중서층의 사인의식(士人意識)이 확대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최북, 김홍도, 임희지, 김득신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들의 묵죽화는 남종문인화풍과 다소 거리가 먼데, 가슴속의 시정과 정취를 자신의 감흥과 감각의 흐름에 따라 붓끝에 실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말의 묵죽화풍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진경시대 문화가 급속히 퇴조하고 청조의 학술과 문예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북학운동이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으며 문예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김정희의 영향으로 많은 직업화가들까지도 문인화풍으로 변모하였고 그에 따라 사군자 그림이 부흥하였다. 조선 말기 유명한 묵죽화가로는 문인화가인 신위, 김조순, 송상래가 있고 김정희의 뒤를 이은 허유와 조희룡이 있다. 신위는 강세황의 영향으로 청대 묵죽화풍을 수용하고 명?청대 화보를 임모하는 등 많은 노력으로 개성 있는 묵죽화풍을 이룩하였고 김조순과 송상래에 의해 그 맥을 이어갔다. 추사화파의 대표자격인 조희룡은 추사의 제자임에도 추사가 가장 우려했던 감성적이며 통속적인 문예성향을 가졌던 중인 출신의 화가로 추사 사후 문예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는 장승업으로 대표되는 화단의 변화로 묵죽화는 점점 사라져가게 된다. 추사의 학예를 계승한 문인인 민영익 역시 묵죽화보다는 묵란화에 천착하였으나 상해화단과의 교류를 통해 근대 묵죽화의 장을 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