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알잖아. 이 나라엔 답이 없어.”
긴 논쟁 끝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고, 이 부장은 말문이 막혔다. 답이 없는 곳에 자신은 왜 남겨 두는지 궁금했지만 결국 아내 뜻에 따르기로 했다. 대출금도 채 갚지 못한 집을 반월세로 내놓았고, 이 부장은 월세를 내는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월세 차액에 월급을 보탠 돈으로 아이는 훌륭한 캐나다 발음을 배웠다. --- p.16
외로운 날은 야근을 했고, 말할 수 없이 허한 감정이 갑자기 몰려오는 날이면 회식을 했다. 그때마다 아랫것들은 도끼눈을 했지만, 상사들에겐 회사에 헌신하는 직원으로 사랑받았다. --- p.16
마흔여섯. 돌이켜 보면 적지 않은 위기를 넘겨 온 세월이었다. 이 부장은 ‘인생 최대의 위기’라 적힌 순위표에서 ‘유격 면제 포경 수술’ 바로 밑에 ‘비뇨기과의 트인 바지’를 올려놓았다. ‘첫 테이트에서 터진 설사’와 ‘감춰 놓았으나 어느새 감겨 있던 침대 밑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는 한 순위씩 뒤로 밀었다. --- p.23
검색하는 자료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복잡해졌다. 전립선염은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단순한 질환이 아니었다. 감염이 아닐 경우, 발병 원인의 가짓수는 버뮤다 삼각지에서 사라진 배의 수만큼이나 많았다. 뿐만 아니라 유독 세 단어가 자꾸 눈에 띄었다. 발기부전, 성 기능 감퇴, 성욕 감퇴. 이 부장은 생각했다. 이제 와 그에게 성 기능이란 효용 가치가 없는, 퇴화해도 아쉬울 것 없는, 그런 기능이었다. 더 자식을 낳을 일도 없었고, 아내는 캐나다에 있었으며, 숨겨 둔 애인도 없었다. 1년에 한두 번 업소를 가기 위해 유지하기엔 유지비만 많이 드는 불필요한 스펙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라져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 부장은 조그맣게 중얼거려 보았다. 고자가 되는 건가? --- p.35
아니, 실은 행복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제 3년 안에 임원이 되지 못하면 스스로 나가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대기 발령이 뜨고, 책상이 사라지는 일이 머지않았다. 그 일이 닥쳤을 때 아이가 기대대로 성적을 낸다면 미국의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을 터였다. 부장 연봉을 모두 쏟아부어도 부족한 학비를 놓고 구조 조정을 당한다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이 두려워 그는 회사에 목을 매달았다. --- p.58
이를테면 그날 이전까지 이 부장은 자신이 오르가슴을 경험해 보았으며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경험했던 사정감이란 고작해야 엄청나게 넓은 테마파크에 놀러가서 입구만 구경하고 온 격이었다. 쾌락이 무엇인지, 쾌락이 줄 수 있는 감각의 폭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되자 이 부장은 모든 사람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였다.
---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