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를 지칭하기 위해 ‘초국적 지역론(transnational localism)’ 혹은 ‘현지화(glocalization)’가 아니라 ‘초국적 도시이론’이라는 은유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도시생활과 연결하는 사회적 변화 가능성의 넓은 범위를 포착한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그러한 변화 중 몇몇은 세계 전역의 도심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촌락(Goldring, 1998; Smith, 1998)이나 중국의 공업도시(Smart and Smart, 1998), 혹은 시골(Schein, 1998a)에서 발생하는 것도 포함한다. …… 나는 교차하는 초국적 의사소통 회로와 서로 관통하는 지역적·초지역적·초국적 사회적 실천―이러한 실천은 특수한 시기에 특수한 장소에서 “모이며”, 그리하여 장소 만들기, 권력적 차이의 사회적 구성, 개인과 그룹, 국가적·초국적 정체성, 그리고 그것들의 차이라는 정치적 쟁점을 만들어낸다―을 지칭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한다.---p.24
초기의 도시이론가들이 그랬듯이 하비의 도시이론에서도 자본주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강력한 문화논리는 전 세계에 침투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장소에서 인간주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 주체를 자본주의의 틀 속에 흡수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이론가로서 하비의 포스트모던 도시 조건에 대한 고찰의 논리는 막스 베버나 칼 마르크스의 논리와 유사하다. 베버가 합리성의 새장(iron cage)에 대한 테제에서 생활세계의 도구적 합리성이나 관료화를 20세기 초 모더니티의 지배적인 문화의 차원으로 봤다면, 하비는 비합리주의, 파편화, 유동적 인격의 발전을 20세기 후기 포스트모더니티의 지배적인 문화적 강령들로 그리고 있다. 게다가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를 모더니티의 급진적 단절로 보기보다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최종 단계로, 즉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 재현한다. 따라서 하비의 도시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의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발상이나 스타일에서 그가 모더니스트이든 포스트모더니스트이든, 그는 도시의 발전과 시기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전적으로 지구적 서사의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행위성(agency)을 결핍하고 있다는 제2장 전 지구론의 ‘타자’로서의 지역적인 것이 내 비판의 핵심이다.---pp.52~53
경제적 지구화라는 오늘날의 거대 서사는 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흥 국제통화주의 정권, 개발국가와 기구들에 대해 정치적인 공격을 제도화해왔던 일련의 기구들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 제안되어왔다. 이러한 공격의 선봉에 서서 지구화를 지향하는 기구들은 “1980년대의 채무위기라는 전조 아래”(McMichael, 1996: 25) 국가적인 지향을 갖는 개발국가들의 기구들에 대항해 지구적 효율성 및 금융적 신용이라는 통화주의적 어젠다를 제안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 결과 도시와 다른 지역들이 그들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행위자와 기구들을 통해 새로운 지구적인 공공 철학 안에서 틈새를 찾으려고 하거나 재정 긴축을 실천하며 통화주의적인 원리들과 정책들을 확정하는 ‘지구화’의 압력에 저항함에 따라, 지구화주의자들의 정치 기획은 ‘지역’의 의미에 관한 일련의 투쟁을 낳았다.---p.119
지구-지역 간 상호작용에 관한 도시연구 분야에서의 논의 속에서 특히 두 주제는 이러한 ‘지역’ 개념을 구성해왔다. (요컨대) 지역은 한편으로 그 속에 자리 잡은 공동체들의 문화적 공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반대로 지구화의 파괴적 진행에 대한 집합적 저항이 행해지는 자연화된 공간(naturalized space)으로 묘사되어왔다. 이 장에서 나는 지역에 대한 이 두 시각이 안고 있는 한계에 대해 논의하여, 지역을 보다 역동적으로 인식하려는 내 작업의 서장으로 삼을 것이다. 이는 복합적이고 공간적으로 분산된 국가를 초월해서 오늘날 일상의 도시생활이 경험되고 영위되는 방식들에 긴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소통 회로와의 연결하에 사람과 장소에 대해 더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p.178
후기 모더니스트(latemodernist) 수용국은 ‘문화적 소외’, ‘미등록노동자’, ‘비합법’ 정치적 피난민들과 같이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초국적인 이민자들을 다시 정의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들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이 느끼고 있는 주권의 부식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주변화되고 침묵하고 배제된 미등록 ‘타자들’에 관한 최근 미국에서의 담론적 노력들은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것들을 가지고 초국적 이민자들을 국민국가와 국민경제로 통합하려는 작업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의 징후이다. 공장노동자, 노동조합, 공립학교, 도시 정치 모두는 스스로 초국가화되었으며 따라서 국민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통합 수단과 복잡하게 뒤엉키게 되었다. (반면) 저개발국가와 사회들은 초국적인 이주자들을 그들의 국가적 담론과 기획들로 다시 통합해가면서 풀뿌리 정치를 탈정치화하고 그들의 영토에서 싹트는 반대세력을 규제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고안하고 있다. 이 장에서 논의된 새로운 정치적 공간들은 스스로 조직한 프로젝트로 생존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싸워야만 하며 버텨내야만 한다. 이것은 새로운 정치적 공간들이 서서히 쇠퇴해갈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존하는 권력의 네트워크들이 새로운 초국적 정치적 공간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며 정치의 범위를 그것들이 현재 지배하는 영역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pp.283~284
초국적 도시이론 연구를 위한 효과적인 접근은 도시의 사회적 공간에 위치한 사회문화적·정치적·경제적 네트워크의 분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분석된 사회적 공간은 초지역성으로 유용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초지역성이란 사회적 행위가 지역적·초과지역적(extra-local) 제도와 권력·의미·정체성의 형성에 사회적 과정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반면 하비나 글로벌시티 애호가의 작업에서처럼, 지구적 수준에서 시작해 지구적 발전에서 나온 도시 결과를 연역하는 것은 종종 지나친 일반화로 이어지고 자기충족적인 ‘위대한 이론’을 생산하게 된다. 학자가 자기 공식의 이론적 고상함에 갇히게 될 때 이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후기 자본주의, 시공간 거리 혹은 압축에서, 그들은 “저기 밖에 있는” 세계가 어떻게 상상되고 사회적으로 구조되며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무시한다. 순전히 지역 차원에서 초국적 도시이론의 분석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도 동시에 함정이다. 지역적 지식(Geertz, 1983)에 특권을 부여하거나 지역공동체를 존재론적 의미의 신성한 공간으로 본질화함으로써 연구자들은 종종 안쪽을 향한 터널의 시야를 개발하지만, 그것은 모두 인간의 의도를 사회적 네트워크, 구조적 맥락, 역사적 변화와 연결시키는 데 실패한다. 그러나 초지역성으로 바라본 특정 도시의 차원에 초국적 도시이론 연구를 위치시킴으로써 이런 함정을 피할 수 있다. 특히 초국적 네트워크가, 그것이 완전히 지역적으로 기반을 두고 유지되는 점과 비교하면서, 어떻게 작동하고 진리와 결속의 원칙이 어떻게 국가 영토를 가로질러 구성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