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두’는 촉(蜀)나라 초대 황제인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을 가리킨다. 그는 유비현덕이 죽은 후 제2대 황제가 되지만, 위(魏)나라에 패해 투항하고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 일생을 마친 바보 같은 인물이다. ‘아두’는 중국어로 멍청이라는 뜻이다. 보시라이가 시진핑에게 유아두라는 별명을 붙인 것은, 시진핑이 심약하고 유선(劉禪)과 같이 멍청한 자라는 의미로 실로 무시무시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 p.24
시진핑은 1953년생으로 62세이다. 시중쉰 전임 부총리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실각으로 고향 산시성(陝西省)의 농촌으로 7년간 하방(下放)되었다. 이때의 정신적 트라우마로 타인과의 다툼을 싫어하고, 처참한 투쟁을 피하며, 팔방미인형인 온화한 성격을 형성했다고 한다. 장기로 비유하자면 정석밖에 두지 않는 타입으로 다음 수를 읽기 쉬운 정치가이기도 하다. --- p.25
장쩌민은 경제 혼돈과 부동산 버블의 기초 조건을 만들어내고, 군에 바짝 다가서서 반일을 무기로 민족주의(nationalism)를 선동하고 일류 국가의 지도자로 가장했다. 그는 일본인이 중국을 싫어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궁중 만찬회에 인민복을 입고 등장해 “역사를 거울로 삼으라[以史爲鑑]”는 연설을 하며 으스댔다. --- p.90
중국을 지배하는 독재자는 국내의 여러 가지 모순으로부터 국민의 시선을 떼어놓기 위해 ‘애국’ 등 싸구려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늘 일본을 적대시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얻고자 기를 쓴다. 겉으로는 싱글벙글 웃는 중국이, 국내에서는 노회하고 교활하게 악의에 가득 찬 반일 교육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반일’이란 국민을 결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사하는 무기[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이것을 ‘싸구려 술’이라고 불렀다]이며, 정치가 입장에서 쉽고 편리한 아편과도 같은 것으로, 후진타오도 이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p.100
2003년에 원자바오가 국무원 총리가 된 것은, 전임자였던 주룽지와의 연줄에 의한 것이다. 민완 총리라고 불렸던 주룽지는 금융 해방을 과감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들은 원자바오에게도 동일한 행정 수완을 기대했다. 원자바오는 한동안 서민으로부터 인기가 높았고, 또한 사실은 ‘입만 산 사람’이지만 서방식 민주주의를 주장해서 서방 매스컴의 평판도 좋았다. 그러나 실태는 이와 크게 동떨어져 있다. --- p.104
시진핑의 최대 브레인은 모친 치신이라고 일컬어지지만, 그는 대학 동급생인 허리펑(何立峰)을 참모역에 두고, 천시(陳希) 등 어린 시절 친구의 발언에도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의 가족들이 비즈니스를 확대하여 부호 집단을 형성했듯이, 시진핑의 자제들도 이미 홍콩에 진출하여 부동산 개발로 부호가 되어 있다. 황제의 자리를 손에 넣은 현재, 이권과 관련된 비즈니스 과점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시진핑 일가는 자산 규모가 400억 엔 이상이라고 할 만큼 대부호이다. --- p.112
장쩌민이 은퇴하고 저장성에 놀러왔을 때에도, 마침 장쩌민의 배경으로 저장성 서기가 되어 있던 시진핑은, 장쩌민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달라붙어 각지를 안내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고전 소양을 발휘해 시를 암송하거나, 각지의 기념관이 휘호(揮毫)를 요청할 때에 달필을 자랑하는 장쩌민의 연속되는 질문에 시진핑은 답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관광 안내와 역사를 술술 외워 남편을 도왔던 것은 펑리위안이었다. --- p.116
일찍이 시진핑이 ‘형’이라고 불렀던, 또 1명의 선배는 실각한 보시라이이다. (중략) 시진핑은 형뻘이었던 보시라이를 잃고, 일시적으로 기운이 빠졌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추의 권력투쟁으로, 후진타오가 통솔하는 공청단과의 파벌 간 싸움에서 열세에 몰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의 떠오르는 스타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보시라이는 잠재적 라이벌이며, 그의 실각은 장래의 2인자를 미연에 제거하는 의미에서 볼 때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 p.134~135
그러나 공산당 독재 정치제도 아래에서 민간인이 비즈니스에 성공하려면 뇌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 뇌물 자체가 중국의 문화이다. 뇌물의 액수가 적으면 권력은 이 기업을 횡령하든지 부숴버린다. --- p.174
과거 소니와 마쓰시다전기(松下電器, 파나소닉의 전신)가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사를 매수했을 때, 미국은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불쾌하기는 했으나 일본인은 다루기 쉽기 때문에 문화가 잠식될까 하는 걱정은 없었다. 유대인과 이탈리아인이 구축한 미국 영화 산업은 미국인에게 전통문화라고 하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이 할리우드에 도전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반응은 달랐다. 완다그룹은 중국 최대의 영화관 체인 경영을 비롯해, 부동산 비즈니스에도 손을 대왔다. 1988년에 왕젠린이 창업하고 최초에는 부동산 개발로 활용했던 복합기업체이다. (중략) 중국 국내에서 경영하는 영화관은 88개, 스크린은 730개를 자랑한다. 이 완다그룹이 미국의 대형 영화관 체인 AMC 엔터테인먼트를 매수했던 것이다. AMC는 경영 압박 때문에 중국 기업이 매수하는 것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액수는 26억 달러였다. 기업 가치는 기껏해야 15억 달러여서, M&A 전문가들은 “비싼 매물이다”라고 비웃었다. --- p.176
중국을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것이 군부, 즉 중국인민해방군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당(黨)의 군대’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 p.220
‘중국’이라는 국가는 한 꺼풀 벗기면 행정 등은 장식이고 당이 전부이다. 시장보다 시의 당 위원회 서기가 더 상위인 것처럼 말이다. --- p.223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작가인 류샤오보는 중국 민주화의 상징, 희망의 별이다. (중략) 류샤오보가 중심이 된 중국 민주화의 ?2008년 헌장?으로 2010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중략) 류샤오보가 기초를 다진 ?2008년 헌장?은 인터넷에 유포되었고, 찬동자가 금세 1만 명을 넘었다. 당국은 류샤오보를 ‘국가 전복 선동죄’로 구속했다. 가족과 변호사와의 면회도 불허했으며 11년 형을 언도했다.
--- p.289~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