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은 오필리어를 사랑했던가? 그리고 그녀와 더불어 세계를 재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그렇다. 묘혈 앞 진실의 순간에 그는 명백히 진지하고 대단히 감동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외칠 것이다. 거기서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대번에 죽은 오필리어 곁으로 뛰어내릴 것이다. 여기서 작품에 대한 주된 지적들 가운데 하나를 하자면, 그는 첫 만남부터 부단히 처녀를 하나의 단순한 이미지로 대체했다. 이는 그로 하여금 그녀를 “영혼의 우상, 신성한 여인,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쨌거나 갖고 있는 현실, 곧 하나의 육체, 또는 보통의 욕망과 함께 지금 여기 있는 실존 앞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도록 만들었다. ---「햄릿의 망설임」중에서
햄릿은 자기의 과제임을 아는 복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기는커녕 바야흐로 고삐 풀린 자기의식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흔들리도록 방기한다. 그는 왕을 죽이는 일을 뒤로 미룬다. 그리고 조금 뒤 그가 왕을 보았을 때, 왕은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있어 무방비 상태이다. 햄릿은 칼을 뽑지만 다시 즉시 그것을 칼집에 넣는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기회를 포기하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기도는 클로디어스가 진지하게 후회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실 때문에 신의 용서를 받은 그는 햄릿의 칼에 죽었을 때 천국에 갈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이는 햄릿이 추구하는 복수와 거리가 있게 된다. 그보다는 죄인이 경건치 못한 습관을 되찾길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는 그때 왕의 육체만큼이나 영혼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햄릿은 추론한다. 하지만 이는 그가 욕망하는 것을 감추기 위함이며, 그것은 스스로를 바라보기 위해 그가 몸을 기울이는 거울을 잃어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햄릿은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되길 원한다. ---「햄릿의 망설임」중에서
셰익스피어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경각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데 심지어 『햄릿』에서도 그는 두려움의 양식만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이 저버린 존재 의지의 비극에서는 의미의 모호함들이 의미의 희망에 아무런 자리도 남겨주지 않으면서 취합되는 것이 사실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햄릿』이 결국에는 그 이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 『햄릿』은 우리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텍스트이기에 앞서 생성하는 중에 있는 글쓰기였고, 나는 그렇게 남아 있는 성찰 속에서 다른 모든 차원들에 잠재된 하나의 차원을 본다. 글쓰기? 그것은 사용된 각각의 단어 속에서 언제나 좌절되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귀 기울임이다. ---「셰익스피어의 결단」중에서
클로디어스는 비틀거리는 육체 위로 가짜 왕관을 얹은, 존재 없는 텅 빈 몸짓과 담론을 주워섬기는 마네킹들과 다름없다. 거트루드는 어떠한가? 아마도 하나의 불안일 것이다. 그러나 행동은 불가능하다. 햄릿은 어떠한가? 존재마저 거부해야 할 악에 매혹된 채 스스로와 싸우는 정신이다. 거기에는 죽음의 도식이 사회의 반영으로서 전적인 지배를 행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햄릿』에서 발견하는 연극 속의 연극은 소네트 작업에서 셰익스피어가 포착한 말 속의 닫힘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셰익스피어의 결단」중에서
햄릿이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윌리엄 셰익스피어(작품을 쓰던 시절의 개인적 모습)의 반영이 아님을 뜻한다. 이 인물은 그보다는 막 태어나는 시인이 오로지 심리학만을 가지고, 다시 말해 단지 영속하기만을 원하는 모든 것의 공모자와 더불어 자기 자신 위로 몸을 기울일 때 거기서 볼 것이라고 상상하는 미흡하고 거짓된 얼굴들과 결별하도록 도울 것이다. 『햄릿』에서 바람직한 위대한 인간은 아직 미지의 존재, 미래에 속한 존재로 남아 있다. “거기 누구냐?” 이 단어들이, 과거의 환상의 유령이 배회하는 밤에 시작되는 작품의 맨 처음 대사라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전조이다. ---「연극과 시」중에서
오필리어는 희생의 상황에 처한 여인이다. 우리는 그녀가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꺾은, 그러나 이제는 아무에게나 건네주는 (나는 다시 한 번 랭보와 더불어 바겐세일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꽃들이 그녀가 품었던 희망,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육체와의 일치만큼이나 본능적이고 풍부한 희망, 다시 말해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믿음, 신뢰의 상실에 관련되어 있음을 안다. 우리는 또한, 그녀가 이성을 잃기보다,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애쓰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의 주위에서 부산을 떠는 다른 사람들에게 삶을 이해할 책무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오필리어는 결코 미친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꽃들을 통해서 진정한 실재임을 아는,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꿈꾸는 것, 그것도 희망 없이, 그로 인해 죽을 정도로 꿈꾸는 것밖에는 자신에게 다른 도리가 없는, 자연과 실존의 상호적 내밀함을 말할 따름이다. ---「연극과 시」중에서
햄릿이라는 인물의 모든 것이 본질적입니다. 그가 자신과 맺는 관계가 인간조건 전부를 문제 삼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의 세계 내 존재가 보여주는 양상과 다양한 순간의 자기의식이 어찌나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하나를 주목하면 다른 것들까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저를 항상 놀라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 자기 체험을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이 체험은 그가 이해하고 표현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수행하는 발견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망설임, 되풀이가 오고, 이것들은, 셰익스피어 역시, 햄릿이 누구인지, 그리고 글을 쓰는 순간에 그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 발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작품의 현대성을 이루는 이 실존적 더듬거림이 바로 가장 강하게 제 주의를 끈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목소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