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이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과 조선 사이의 국적 변경은 재일한인 사회에 나타나는 특유한 국민 정체성의 유동성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동안 재일한인의 국적 변경 문제는 주로 일본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다뤄졌고, 본국 내부의 상이한 두 국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국’-‘조선’의 경계와 국적 변경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과 북한, 민단과 총련 등 대립·경합하는 두 본국 및 그와 연계된 재일한인 민족단체들의 정치적 역학이라는 측면에 관심이 편중되었다.
이 장에서 필자의 관심은 앞과 같이 주어진 구조적 조건하에서 재일한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삶의 전략을 모색하고 실천했는가 하는 데 있다. 구조적 조건에 규정당하면서도 정치적 귀속의 표상인 국적의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기존 국적의 변경 또는 유지는 결국 개인의 결정에 의한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1장 “‘한국’과 ‘조선’ 경계 짓기와 경계 넘기”」중에서
협정영주권을 신청하는 데 있어 장손으로서 집안일을 돌본다든가, 장남으로서 제사를 모신다든가, 떨어져 사는 가족들과 왕래가 가능하고 초청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재일한인의 생활 세계는 국경을 넘어 한국과 일본 양편에 걸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가족 전략은 일본에 거주하는 가족뿐 아니라 본국의 가족도 포함한 전략이 된다. 협정영주권은 재일한인뿐 아니라 본국의 가족, 친지에게도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협정영주의 자격이 있으면 가족을 일본으로 초청할 수 있었고, 재입국 허가 기간이 길기 때문에 한국에 상당 기간 머물면서 집안의 필요한 일들을 할 수가 있었다. ……
---「1장 “‘한국’과 ‘조선’ 경계 짓기와 경계 넘기”」중에서
여기서 ‘재한재일한인’이란 일본의 특별영주권을 갖고 있으면서 재외국민의 신분으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학업, 일, 결혼 등 다양한 이유로 한국에 생활 기반을 두고 거주하는 사람들로, 이들 중에는 사실상 한국에 정착했다고 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 탈냉전·글로벌화의 진전을 배경으로 1990년대 이후 재일한인의 한국과의 교류·왕래는 대폭 증대했고, 이와 더불어 한국에 거주하는 재일한인도 증가했다. 재일한인과 본국의 거리는 이전보다 축소되었고, 1세, 2세에 비해 3세들이 본국과의 거리가 멀다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2장 “재한재일한인, 본국과의 새로운 관계”」중에서
조사/통계 자료의 검토 시기를 이렇게 한정한 것은 ‘1955년’의 시점이 ‘전후의 종결’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듯 일본 사회 안에서 정치적·경제적인 분기점이자, 재일한인 사회 안에서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결성(1955)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점을 감안한 결과다. 이 점은 재일한인 집단을 둘러싼 조사/통계의 실천에서 1955년까지는 일본 정부와 재일한인 단체 간 경쟁과 충돌이 중요한 문제였지만, 1955년 이후로는 재일한인 사회 내에서 민단과 총련 간 조직화된 헤게모니 경쟁이 더욱 심화되어 갔고 이들이 점차 조사/통계 생산의 주요 행위자가 되어갔던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3장 “재일한인 인구 및 실업 통계의 생산과 전유”」중에서
다시 말해, 1951~1953년 단계에서 재일한인 단체들이 조사하여 펴낸 통계에서는 재일한인의 빈곤의 실상을 폭로하고 일본 정부에 생활보호의 필요성/필연성을 요구하는 것과 연계하여 제시했던 실업 실태조사/통계, 다시 말해 전후 일본 국가 행정의 실패와 일본 사회 안에 자리한 민족 차별 구조를 비판하고, 나아가 제국-식민지의 체제가 남겨놓은 부정적인 유산이자 흔적으로서의 재일한인의 빈곤한 삶을 부각하려는 용도로 재일동포 단체들이 열심히 수집, 작성했던 통계를, 이노우에는 ‘인도적 귀국 사업’(실질적인 의미에서, 빈곤한 재일한인의 ‘추방’)의 필연성을 지지하는 과학적 근거로서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3장 “재일한인 인구 및 실업 통계의 생산과 전유”」중에서
재일한인에 대한 사회 조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 이른바 ‘재일 2세/3세’의 문제, 다시 말해 새로운 세대의 출현으로 재일 1세가 구축한 ‘민족 사회’가 실감을 잃고 풍화될 것이라는 위기의식과, 마이너리티에 대한 일본 사회의 무지 및 동화 교육으로 점점 더 민족 식별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본격화한 시대와 정확히 겹친다. 민족 재생산의 위기를 알리는 징후는 언어 사용(‘조선어’ 구사 능력), 이름 사용(본명/통명), 혼인 관계(일본인과의 국제결혼) 등에서 전방위적으로 표출되었다.
---「4장 “‘보이지 않는 자’의 가시화와 헤게모니 경쟁”」중에서
일본어에는 물론 ‘어머니’를 뜻하는 ‘오카아상(お母さん)’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재일한인이나 한국인에 대해서는 원어의 발음을 살린 ‘오모니’라는 말이 종종 쓰인다. 그런데 ‘오모니’는 그 역사가 오래고 쓰임도 넓다. 일제 시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 말에는 식민지 한반도에서 생활한 일본인들의 기억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해방 후 일본에서 나고 자란 한인들의 어머니 및 모국, 모국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나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고민이 단단히 얽혀 있다. 더욱이 흥미로운 점은 이 ‘오모니’라는 말의 쓰임이 결코 재일한인 사회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장 “전후를 사는 ‘오모니’”」중에서
…… 17살에 결혼해 일본에 건너왔다가 남편을 잃은 후 지독한 가난 속에서 김희로를 리어카에 태워 고물을 줍거나 생선을 팔아 자식들을 키워낸 ‘오모니’의 지난한 삶의 여정을 소개하면서 재일한인들의 불우한 처지를 강조하고 있다. …… 사실 이 사건에 관련한 모든 논의는 김희로가 사건 이전에 이미 두 명을 살해했다는 점에서 ‘원천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곧 범행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김희로의 변명에 속을 뿐이라는 야유와 비난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상황에서, ‘오모니’는 …… 그 너머의 ‘민족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창문’으로 기능했다. 이때 ‘오모니’라는 창(窓)은 독특한 윤리적 호소력을 가졌다. 즉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고생을 강요당하면서도 아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쏟는 어머니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모종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5장 “전후를 사는 ‘오모니’”」중에서
소수자(minority) 집단이 책을 통해 소개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공적인 가시성(public visibility)을 획득하는 양상을 주목할 때,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타자의 도래(avenir)’라는 개념은 매우 시사적이다. 즉, 사회적 타자/이방인은 어떠한 범주나 공적 논제이기에 앞서 활자, 사진, 영상 등 특정한 기록·재현의 기술을 통해 ‘출현’함으로써 사회의 문화적 동일성을 흠집 내고 다양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을 다루는 기존의 범주·담론·정책을 근본적으로 되묻는다. 이들의 ‘도래’는 하나의 ‘사건’, 즉 그 자체로서 진지한 탐구를 요청하는 사회적인 현상이며, 이때 그러한 도래를 가능하게 한 ‘책’은 단지 특정한 의미를 담은 ‘투명한 용기’가 아니라 타자/이방인의 낯선 모습, 삶, 기억에 인지 가능한 물질성을 부여하며 그에 대한 해석과 감흥이 다시 현실로 엮이는 과정을 고유한 방식으로 틀 짓는 ‘미디어이자 메시지’다.
---「6장 “도래하는 ‘자이니치 1세’”」중에서
다음으로, 표지에 실린 ‘이름’ 역시 간과할 수 없는데, 이들 이름은 책 내용과 별개의 수준에서, 심지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까지도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책이 수용되는 문화적 맥락을 규정한다. 즉, 1990년대 일본에서 국민국가 비판론과 탈식민주의의 대두와 함께 전후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반성이라는 조류가 형성되는 가운데, 오구마 에이지와 강상중은 활발한 저작, 문단 활동을 통해 ‘내셔널리즘’에 관한 비판적 담론을 주도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기존의 자이니치 연구자가 아닌 이러한 ‘떠오르는 스타 학자들’이 편자로 나섰다는 점은 1세의 문제를 이러한 동향 속에 ‘새로운 테마’로 자리매김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6장 “도래하는 ‘자이니치 1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