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는 1930년대 말부터 공장노동뿐 아니라 농업노동, 보도(報道), 의료 등의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동원되었으며 법령으로 제도화되었던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 여성 동원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군 위안부는 극비 정책으로 이루어져 명확한 법적 근거를 찾기 힘들다. 그로 인한 혼란은 개념상에 그치지 않는다. 근로정신대는 조선에서 임의적 성격이 농후한 관 알선방식에 의존했는데, 이 틈새에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정신대 명목을 이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정신대 동원이 일본군 위안부로 이어진 경우를 피해자 증언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보다 치밀한 조사를 요하는 부분이다.(33쪽)
위안부 강제연행을 보여 주는 자료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우파의 강제연행 부정은 이제 비상식적인 말이 되고 있다. 그보다는 앞서 논의한 대로 ‘(협의의) 강제연행’이라는 담론틀을 벗어나 일본군 위안부 제도 자체의 강제성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피해자의 증언뿐 아니라 위안소 경영자, 일본 군인, 연합군 포로들의 증언을 포함하여, 증언의 가치를 인정하고, 여기에 당시의 행정절차, 군대와 전쟁의 상황 등을 엮어 역사적 사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1990년 초 이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을 때 곧바로 시작된 일본의 전쟁책임센터와 한국의 역사학자, 법학자, 여성학자들의 외로운 성과, 최근 연합군 자료 발굴에 큰 힘을 기울이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연구팀 등의 성과에 따라 위안부 강제동원의 진상은 더욱 명확하게 밝혀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호주 등 전 세계의 학자들이 군위안부 제도라는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자 기울이기 시작한 노력도 점차 더 중요해질 것이다.(106쪽)
일본 정부가 법적 해결은 끝났다는 입장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 상태에서 마침내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 합의에 이르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합의는 일본 정부는 ‘(1) 아베 총리가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한다, (2) 10억 엔을 일본 정부가 출자하여 한국 정부가 재단을 설립하고 관리한다, (3) 이것으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하며 앞으로 상호비판을 자제한다’ 등이며, 한국 정부는 ‘(1) 이것을 최종적.불가역적 해결로 한다, (2) 소녀상에 대해 우려하여 적절한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3) 국제사회에서 상호비난을 자제한다’ 등의 내용이다. 시민단체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반대의견이 시민사회에서 더욱 확대되고 있다. 소녀상 철거가 합의문에 포함되어 있는 데 충격을 받은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소녀상 주변을 지키는 새로운 양상의 운동도 출현했다.(195쪽)
궁극적으로 이 문제의 올바른 해결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앞으로 이러한 인권침해가 더 이상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상 세계의 인권단체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국제사회의 진보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어떤 범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 범죄에 대한 적절한 단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피해자와 운동단체들은 일본 정부에 피해자 개개인에 대하여 적절한 배상을 할 것과, 책임자를 밝혀내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UN, ILO를 비롯한 세계의 기구들도 일본 정부에 대해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배상을 권고하고 있다.
---p.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