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쭈뼛거리다 손가락으로 거대한 연주자를 가리키며 호소하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저기 좀 보세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요? 저기 저 고독한 연주자의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요?
바이올린 소리요? 아, 혹시 저기 저 까만 조형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하, 그건 당신이 잘못 본 거예요. 저 사람, 망치질하고 있잖아요. --- p.15
저 사람은 삼 톤이 넘는 팔을 움직여 일 분마다 일 회씩 위아래로 쉼 없이 망치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얼핏 보면 저 사람,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네요. 왼손에 무엇을 잡고 있는데, 꼭 바이올린 끝머리를 잡고 있는 듯도 하고요. 하지만 망치질을 하는 겁니다. 해머링 맨이라고요. --- p.16
K가 완전히 몸을 돌렸을 땐 K의 목이 댕강 잘려 나가 있었다. 어디 목뿐인가. 뒷짐을 지고 있던 양팔도 깨끗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그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K의 몸통에서 얼굴과 양팔이 떨어져 나가서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를 골탕 먹이려는 K 때문이었다. 평소의 K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함께 점심식사를 나눈 뒤면 호주머니 깊은 곳에서 박하 맛이 나는 사탕을 남몰래 꺼내 자신의 손바닥에 쥐어주곤 했던 절친한 동료가 왜 이렇게 가혹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 p.53
그는 무덤으로 바투 다가갔다. 그러고는 허리를 꺾고 고개를 움직여 이 얼굴 저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분칠한 듯 하얬지만 어디서 본 듯 낯설지가 않았다. 아니, 굉장히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쳇, 좀 전에 사무실에서 아무리 뒤져도 꼭꼭 숨어 있던 머리들이 바로 여기에 있었군, 하며 그는 낮게 투덜댔다. (……) 두두룩이 잘 쌓여진 창백한 백색의 무덤은 물론 피라미드 모양이었다. --- p.62
왜 하필 반딧불 생각을 한 거지? (……) 그는 이 대도시의 삶을 버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대도시의 삶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일 없이 꽉 짜여진 견고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내는 사업적 성취감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반딧불 따위를 생각하며 감상적인 기분에 빠지기에는 너무 바빴다. 그는 사실 반딧불이 반짝거리는 어느 깜깜한 숲 속에 있어본 적도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72~73
그는 난데없는 베토벤의 출현에 놀라 기겁을 하는 대신 인상을 썼다. 지금은 식사 중이었고 어느 누구와도 한담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베토벤은 몽유병자처럼 밤낮없이 어딜 헤매고 왔는지 무척 지쳐 보였다. 거기다 병색이 완연한, 해골처럼 깡마르고 파리한 얼굴빛이었다. 그 창백한 얼굴엔 베토벤 특유의, 뭘 보든 그럴 것 같은, 부리부리하고 저돌적으로 치뜬 눈망울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분명 베토벤이었고, 눈빛은 비통에 잠긴 듯 충혈되어 있었다. --- p.80
베토벤이 연신 같은 말을 하더군. 난, 억울해요. 난, 억울해요. (……) 나는 악의에 차 있고 완고하고 인간을 혐오하는 악종 인간이 아니란 말이에요. 난, 억울해요. 도대체 무엇이 억울하다는 건지, 나는 그 반복되는 똑같은 말에 넌덜머리가 났어. 내가 약간 비웃음을 담은 목소리로 어깨를 움찔대며 그 작자의 말을 흉내 냈지. 난, 억울해요. 난, 억울해요. --- p.86~87
간판에는 조랑말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빨간 활자체로 ‘십이지 카페’라고 쓰여 있었다. 일 년 중 하루, 자유로운 복장과 동물 가면을 쓴 사람이면 누구든지 숨어들어와 은밀한 욕망을 나눌 수 있다는 게 그 카페의 특징인 모양이었다. 그 ‘십이지 카페’에서 정장 차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은 왜 허락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123
어느새 그의 두 눈엔 몽롱한 빛이 담겨 있었다. 마법의 음료라도 마신 것 같았다. 그는 그 눈으로 저 건너 세상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의 사각 프레임 속에는 울긋불긋하고 알록달록한 관상어들의 세상이었다. 그 물고기들 뒤로 포플러나무가 바람을 묵묵히 맞고 있었다. 검은 포플러나무였다. 그 나무를 배경으로 제브라 다니오 한 마리가 살랑거렸다. --- p.149
구조물 곳곳에도 크고 작은 금이 가 있고 그 균열 부위를 시멘트로 땜질한 흔적이 뚜렷했다. 그가 또 하나의 땜질을 발견했을 때 마젠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p.……) 그 울음소리가 정말 마젠타의 것이라면 어떻게 굽이돌아 여기까지 온 걸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가는 곳’이라고 써져 있는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본 건 ‘나가는 곳’이 아니라 ‘들어가는 곳’이었고, 그것은 노란색 표지판이었다. 그는 아뜩했다. 아, 어떻게 된 일이지?
--- p.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