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에게 이상은 당대의 자본주의, 그 황금의 유혈적 질서 안에서 신의 사명mission으로 파송missio되어 있는 ‘천사’였으되, 끝내 날개가 부서진 천사였다. 파송의 절대적 사명과 그것의 필연적 실패의 동시성 속에서, 그 ‘아이러니’ 속에서 이상은 “‘절대絶對의 애정’을 찾어 마지않는 한 ‘퓨리탄Puritan, 청교도’”으로 “점점 더 비통한 순교자의 노기를 띠어간 것이다”. 그렇게 부서진 날개의 운동은 단 하나, 순교로 이어진다. 그러하되 이상이라는 천사의 그 순교란 ‘속이는 신’의 품 안에 안락?조화?합일로 안겨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신을 직시하는 치켜뜬 두 눈으로 보존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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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체감했었던 식민지 근대의 일면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한 구절은, ‘신에 대한 몹쓸 모독자’가 숨어들었던 그 잡지, 곧 『가톨맄청년』에 실려 있었다. “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을헐어서전당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여달렷다. 문을열려고않열리는문을열려고.” 수명을 헌다는 것은 삶/생명이 직접적으로 지배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허물어지는, 줄어드는 수명, 그렇게 생명을 지속적으로 저당잡음으로써 삶의 형태를 목숨 건 삶으로서만, 목숨뿐인 삶으로서만 허락하는 사회의 상태. 문 안의 문, 그 문 안의 또 다른 문.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겹겹의 문들 앞에서 버려지고 목 매달리는 삶. 그런 삶이 품고 있는 꿈이란 어떻게 되는가.
--- p.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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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그렇게 투시하며 걷는 까마귀/신이다. 그는 경성의 모더니티 속을 걷는, 혹은 그 위를 날고 있는 산보자이다. 그런데 그가 걷는 곳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아니었다. 죽었다 깨도 그는 파리의 산보자일 수 없었다(그리고 그 사실조차가 이상의 엑스레이에 의해 투시된다). 그는 걷되 모조되거나 위조된 근대의 경성을 걷는 중이다. 걷되 ‘절름발이’로 걷는다. “아아이부부는부축할수없는절름바리가되어버린다무사한세상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끗끗내잇다.”(1: 105) 절름거리는 신, 불구의 신은 말한다. 무사태평한 근대성이야말로 병원이라고, 치료되어야 할 질환을 가졌음에도 병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곧 근대의 인간들이라고.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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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은 어디인가. 지독히 추운 그 중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나의 사고와 그 사고의 이면에 대한 또 다른 사고의 촉구 속에서, 하나의 표현과 그 표현의 배면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의 요청 속에서 사고와 표현의 잠재성을 발생시키고 발현시키는 장소. 거기가 바로 중간이다. 그 중간이 바로 아포리아의 장소이다. 그 중간에서만 하나의 제로-예컨대 도래중인 나에 의한 구원, 숫자의 소멸, 근대초극에의 의지-는 그 제로의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제로-예컨대 일제학살, 진보된 우생학, 근대추구에 대한 의지-와 동시적이며 등질적인 것으로서 인지될 수 있다. 그 중간에서의 긴장이 무너질 때 하나의 제로는 그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제로와 합치한다. 그때 사람과 사고가 동시에 학살의 대상으로 된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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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근대의 추구와 동시에 근대의 초극을 감행해야 했던 모순의 무대 위에서 “양처럼 유순한 악마의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 양처럼 유순한 탈정치적 표면의 문학 속에 실은 당대의 질서를 무화하려는 악령적 의지가 넘실거렸다는 자기변호. 그러하되 그 시절 그의 연기는 말 그대로 비극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한다(오늘 이곳에서의 연기 또한 그때와 먼 거리에 있다고 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비극적인 오늘 이상을 다시 읽는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구조의 파쇄, 전위, 형질전환을 기획하는 신성한 힘의 현현, 또는 그런 힘의 구성을 향한 이상의 거듭된 실패와 좌초. 그것이 이상이라는 비극의 배우가 선택한 연기의 방법과 태도를 결정짓는다. 그것은 달리 말해 “풋내기 최후의 연기”였다.
--- p.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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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은 성천의 야색, 그 칠흑 같은 밤의 적막 속에서 공포를 느낀다. 그는 그 귀기어린 공포, 광대한 암흑 속에서 스스로를 티끌같이 여기면서도 동시에 야망에 불타고, 불안과 우울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환희와 열락 속에 있다. 불안과 환희는 언뜻 대립되는 느낌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불안은 이상이 말하는 ‘악에의 충동’ 속에서 환희와 결합한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악에의 충동이란 무엇이며, 그 충동에 이끌려 상호작용하는 불안과 환희, 불안의 환희란 무엇인가. 하나의 체제가 승인하고 합의한 ‘도덕의 기념비’를 깨고 부수며 선악의 금제와 경계를 지워버리는 악惡, 이상의 악. 그것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신을 살해하는 것이 악이며, 악에의 충동이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묵인하고 방조하는 신에 대한 심판, 살신殺神의 의지, 새로운 신성의 발현과 다른 말이 아니다. 바로 그 심판, 의지, 발현에의 감각 속에서 이상은 스스로를 ‘건강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 건강한 몸으로 신의 무력함을 단언할 수 있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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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돌 위에서의 사적 생산, 사물화된 생산은 마르크스에게 사화死化된 생산이자 죽임의 생산이었다. 화폐의 매개성, 화폐라는 매개력,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그 현실적인 신의 권능이 죽음과 죽임의 생산을 살아 있는 생산으로, 외화된 자기를 본래적인 자기로, 상실한 자기를 애초부터 상실한 적 없는 자기로, 낯선 자기를 친밀한 자기로, 찢긴 자기를 매끈한 자기로, 꺾인 존엄을 기립한 존엄으로 환치한다. 화폐의 매개력은 살아 있는 삶의 생산적 존엄에, 그 존엄의 향유를 위한 의지적 시간들에 ‘죄’를 부과하고, 그 죗값으로 출구 없는 연옥에 삶을 위리안치시킨다.
---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