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무의미한 상투어, 천박한 유행어와 대중 매체를 통한 저속한 표현이 난무하는 가운데 참된 지혜의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교회는 고대의 지혜자, 가장 위대한 현자인 솔로몬, 그리고 솔로몬보다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거룩한 삶에 대한 명령을 담고 있는 영감 된 전승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장소다. 잠언은 성경 지혜의 방향이나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배우는 교육과정의 모델로 남아 있다. 그 결과 잠언은 교회를 향해 부지런히 연구하고 적용할 것을 촉구한다. 따라서 잠언은 헌신된 청년에게는 기초석이지만, 그렇지 못한 청년에게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교회는 젊은이를 위한 삶의 나침판으로 기록된 잠언을 사실상 버렸다(1:2-6 참고). 930개의 고대 잠언 가운데 많은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라”(1:7). “그를 신뢰하라”(3:5-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22:6)는 것이다. 어쩌면 “현숙한 여인”(31:10-31)에 대한 내용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고, “여호와를 신뢰하라”(3:5)는 말씀은 잠언의 상투어가 되었으며,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은 해법이 아니라 보다 많은 문제를 야기하며, 현숙한 아내에 대한 말씀은 시대착오적인 가르침처럼 보인다.
어느 학생의 고백처럼, 일부 정직한 독자에게 “잠언은 진부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확실히 “신실한 증인은 정직한 증언을 하고”(12:17). “거짓말을 아니하며”(14:5). 여호와의 기뻐하심을 입는다(12:22). 분별력 있는 신학자에게 건강과 재물과 번영에 대한 잠언의 신성한 약속은 문제가 되며, 성도에게는 지상의 가혹한 현실과 동떨어진 약속이 된다. 어떤 잠언은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26:4)라는 구절 뒤에는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26:5)라는 구절이 이어진다. 또한 잠언은 바른 이치를 주장하는 반면, 욥기(9:22)와 전도서(9:2)는 그것의 실재를 부인한다.
논리적 사고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은 특별한 운율이나 논리적 근거에 따라 분류되지 않은 잡동사니를 모은 책 같다. 잠언은 마치 거실에 있는 주위 산만한 사람들처럼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건너뛴다. 이 잡동사니를 어떻게 설교하고 가르칠 것인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문화적 배경은 21세기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잠언은 전통과 노인을 우선하지만 현대적 사고는 변화와 젊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잠언은 부모에게 매를 아끼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국가의 복지 담당자들은 그렇게 하는 자를 가두고 싶어 한다. 잠언의 심리학은 정신적 심리학이지만, 오늘날 심리학은 과학적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복음주의 학자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솔로몬이 저자라는 이 책의 주장을 믿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사람에 대한 신뢰로 바꾸며 신적 보응 대신 세상의 질서를 주장한다. 그들은 영감 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인간 이성과 경험의 교육과정을 요구한다. 학자들은 잠언이 범동양적 이교 문학에 정통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나, 외견상 이스라엘의 고유한 성향이 부족해 보이는 잠언이, 이스라엘의 언약과 성경 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욥기나 전도서에 비해 잠언은 “단 하나의 잘못된 교리”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잠언은 그리스도인과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이 솔로몬보다 위대하신 분이라면, 이처럼 오래된 책을 연구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더구나 “솔로몬이 그렇게 지혜롭다면, 어떻게 그처럼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잠언은 번역자에게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잠언은 음(sound)과 의미에 의존한다. “제 때의 한 바늘이 아홉 바늘을 덜어 준다”는 속담은 분별력 있는 상식은 물론 두운법이 한몫을 한다. 그러나 성경 잠언의 소리와 언어유희는 번역을 통해 드러나지 않으며, 따라서 영어 잠언과 달리 일반적으로 기억하기 어렵다. 더구나 책이 요구하는 잠언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어 잠언이 아니다. 영어의 잠언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공리를 말하지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라는 잠언은 많은 미국인이 받아들이지 않는 공리가 아니다. 미국인은 화폐에 쓰여 있듯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네 자신을 믿으라”고 가르치고 설교한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역사·문법적 주석을 집필했으며, 반드시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그것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고자 했다. 나는 서론에서 일부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으며, 본문의 해당 구절에서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주석에 임했다. 정직한 독자의 경우, 해법은 이 고대 문헌의 근본적인 철학적 신학적 통찰력에 대한 이해에 있다. 이 책의 논리는 오늘날 독자에게서 벗어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잠언을 구성하는 시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사고는 교만과 편견에 대해 도전을 받아야 하며, 학자들은 그들의 해석이 신학적 근본주의만큼이나 엄격한 “근본주의적” 역사 비평에 의해 영향을 받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학적 발전과 관련하여 과거의 장점을 유지해야 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