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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박덕선 | 심지 | 2017년 12월 0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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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2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216g | 128*188*20mm
ISBN13 9788966271474
ISBN10 8966271472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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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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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지
네가 사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고
담장 너머 바다가 있다고 아무리 을러도
나는 네게 가서 피어날 거야

보도블록 틈새엔 먼지들이 살지
먼지들이 모여 흙이 되지
쓰리고 아픈 흉터가 뭉쳐 나를 키운다는 거
세상의 작은 것들은 다 알아

내가 샛노랗게 발정하고
볼이 미어터지게 익어가는 것은
먼지만큼의 힘을 갖고 싶기 때문이야

가끔씩 아래를 봐
샛노란 내 프로포즈를 받아줘.
---「괭이밥」중에서


나하고 나랑 그렇게 창가에 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고 도란도란

세상이 나한테만 혹독하다고 하소연하는 내게
너는 가만가만 나직하게 내려다보며 뚝뚝 울어주었지

그동안 나를 위해 울어줄 시간마저도 없어서
가슴에 물이 찬 것이라고 다독다독

출렁이다 넘쳐서 범람할 거라고
악을 쓰며 바다로 가겠다고 하자

너는 바다 속에서 눈물이 된 그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들이 너무 많이 울어서 바다는 자꾸 넘치는 거야

네가 영롱하게 넘치는 술 한 잔을 건네며
이제 그만 바다로 간 새끼는 놓아주자고 말했을 때
술맛이 쓴 것이 아니라 짜다는 걸 알았네

그렇게 찰랑대며 바다를 마시며 놀았지
지는 해가 기우뚱 내 안에 빠져들 때까지
발갛게 놀았지

내 진실한 벗 나와
두 손을 마주 잡고 쓰다듬으며
세상에서 더없이 따뜻한 사랑을 나누었네.
---「종일 나랑 놀았다」중에서


너를 먹어야 내가 산다
아비는 어미를 먹고
어미는 아이를 먹고
아이는 조기 눈알
맛있게 빨고는 입맛을 다신다

하얗게 이승을 버린 쌀눈들이
순교자처럼 제단에 오르고
식탁 위의 세상에 고요히 먹힌다

씨눈의 살들을 맛있게 먹으며
살아 있는 것들은 죽어가고
죽어간 것들은
영혼도 없이 빛이 된다

내가 먹은 수천의 생명
나를 먹은 세상의 입들이
천연덕스럽게 모여
다정한 밥상 풍경이 된다.
---「즐거운 식사」중에서


도도새가 있었다
경쟁할 줄 몰라서
멸종되고 말았다
?
사람들이 있었다
배경이 없으면
경쟁 선에 설 수도 없다
그림자 없는 배경
그림자가 없으면
유령이다
?
경쟁에서 지면
이름도 성도 없다
유령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아홉시 뉴스에 방이 붙고
?
긴 그림자를 가진 사람들이
숲을 이루자
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하늘도 볼 수 없었다.
---「그림자놀이」중에서


아버지가 결혼 밑천으로 떼어주신
암송아지 한 마리
?
사랑이 커갈 때 같이 컸던 송아지
?
황매산 등성이를 까고
호주산 얼룩소들이 정상을 누비던 독재자의 고향
그 뒷산 기슭에서 결혼을 꿈꾸던 내게 무슨 죄 있어
‘소값 파동’ 폭탄 내 사랑에 떨어졌나

이백만 원 넘게 팔리던 소 한 마리?
이십만 원에 팔았다
?
정치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방관했던
청춘, 그 순응의 대가로
나는 빚 시집을 갔고
한국소는 외양간에서 쫓겨났다
?
그때부터였다
정치가
외양간 송아지 한 마리
산등성 나무 한 그루의
삶마저도 좌우지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
1984년 그해 12월
나는 죄인처럼 시집을 갔고
?
30년도 더 지난 지금, 소들은
서양 이름의 괴질을 앓으며 산 채로 매장 당한다
정치가 또 소들을 죽이고 강들을 죽이고
내 아이들의 결혼을 위협한다

정치만큼 무서운 게 없다.
---「정치가 내 결혼에 미친 영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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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선의 언어는 정갈하고 정교하다. 조심스럽다. 자연생태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흡사 송구하다는 듯이 정연하게 말씀의 밥상에 차려낸다. 그는 꽃이 곧 밥이고 자연이 생명의 엄마임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시인, 말씀이 여성이고 엄마라는 것을 이해하는 시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생명의 조화를 무너뜨리는 일들 앞에 서면 그는 언어를 칼처럼 쓴다.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 땅을 착취하고 살아있는 자연의 질서(생태)를 무너뜨리는 인간을 바라보는 박덕선의 시선은 뜨겁고 슬프다. 한 귀퉁이가 무너진 밥상이 우리의 일상임을 그는 안다.
오랜 산고 끝에 한 권의 시집으로 그가 묶였다. 여성이자 농민이자 생태운동가라고 스스로를 세운 그 중심에 시인 박덕선이 있다. 그가 낳은 이 시집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훔쳐낸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고투의 시집이다. 착한 시인은 말을 벼리고 벼려 자신의 품으로 호호 불어 식힌 다음 우리에게 건넨다. 하지만 나는 독자들이 이 시집을 읽고 속에 불이 났으면 좋겠다. 먹기 좋게 달여 그가 넣어준 이 농도 짙은 말씀의 불씨가 확 살아나 영혼이 뜨거워졌으면 좋겠다. 누르고 삭힌 끝에 흘러나오는 이 말이 얼마나 뜨거운지 깨달았으면 좋겠다.

노혜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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