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최립(1539∼1612)은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동고(東皐)·간이당(簡易堂)이다. 아버지는 최자양(崔自陽),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며, 예안 이씨(禮安李氏)와 결혼해 아들 동망(東望)과 딸 하나를 두었고, 서자로 동문(東聞)과 동관(東觀)이 있다. 1561년(명종 16년) 23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장연(長淵)·옹진(甕津) 현감과 재령(載寧) 군수를 지냈다. 1577년(선조 1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질정관으로 첫 번째 사행에 나섰으며, 귀국 후 재령 군수로 재차 부임했는데, 이때 해주(海州)에 은거 중이던 이이와 교유했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원병을 청하는 문서를 짓는데 능문자(能文者)가 필요하다는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발탁되었으며, 같은 해 주청사(奏請使)로 임명되었지만 직책에 걸맞지 않다 해서 부사(副使)의 신분으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지은 글들이 중국 관료들로부터 크게 칭찬받았지만 가문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끝내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1596년부터 1602년까지 간간이 안변 부사(安邊府使), 공주 목사(公州牧使), 여주 목사(驪州牧使) 등의 외직을 얻어 나가기도 했으나 주로 승문원 제조로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전담했다. 개성에 우거했을 때는, 그의 문(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서(書)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62세 때는 평양으로 옮겨 간이당(簡易堂)을 짓고 머물렀다. 문집으로 《간이집》 9권 9책이 있으며,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과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십가근체(十家近體)》 등을 편찬했다.
역자 김우정은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한 뒤, 지곡서당(芝谷書堂)으로 더 잘 알려진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에게 사사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조의 문체정책과 문학론 연구>로 석사 학위를, <간이 최립 산문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한한대사전》 편찬원으로 근무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수 과정을 마쳤다. 현재 단국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교 시절 읽은 적벽부(赤壁賦) 한 구절과 조부의 유품 속에서 찾은 《대학(大學)》의 글귀에 매료되어 한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까지 줄곧 한국과 중국의 한문 산문이 지닌 문학성을 탐구하는 작업에 매달려 왔다. 한문 산문을 분석하고 이와 관련된 여러 비평 자료를 검토하면서 고전이 오늘날까지도 공명하는 무한한 이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새삼 느끼고 있다. 한ㆍ중의 명편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과 이론과 창작 양 방면이 공평하게 고려된 새로운 한문 산문사를 집필하는 일이 최근의 관심사이며, 한자와 한문을 올바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강한 황경원의 고문론>, <월정 윤근수 산문의 성격>, <15세기 기서문의 성격과 의의>, <조선 중기 복고적 산문의 두 경향>, <유몽인 산문에 있어서 자득의 의미와 실현양상>, <선조ㆍ광해 연간 문풍의 변화와 그 의미>, <허균 산문의 연구>, <대학 교양 한자 교육의 현황과 과제> 등이 있으며, 공역서로 《국역 치평요람》, 저서로 《최립 산문의 예술 경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