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면으로 가기 전, 읍내의 장례식장에 들렀다. 철규가 나와서 장인 장모를 맞았다. 새댁의 엄마는 검정 양복을 입은 사위를 보자 가슴을 치며 울었다. 새댁의 동생도 형부를 보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 한쪽 팔로 엄마의 얼굴을 감싼 채. 장례식장 입구에서 모녀는 울었다. 새댁의 영정 사진 앞에 향을 사르고, 그리고 엎어져서 울 뿐이었다. 그에겐 익숙한 향 냄새였다.
--- p.10~11
흩어지는 연기를 멍하니 보며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부산항에서 배에 올랐다가 이듬해 가을
에 부산항으로 되돌아왔다. 20대 초반이었으니 4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돌아왔지만 돌아온 게 아니었다. 처음엔 눈만 감으면 월남 땅으로 가 있었다. 꿈속에서 늘 전쟁터에 가 있었다. 깨어나면 고향 집의 작은 방이었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잠드는 게 무서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도 꿈도 옅어졌다. 가끔 월남으로 가 있는 꿈을 꾸곤 했지만, 오늘처럼 생생하게 느껴진 건 오랜만이었다. 길지 않은 낮잠결의 꿈이 40년 넘는 시간을 한순간에 치워버렸다.
--- p.16~17
“아, 이건 특수 임무를 맡는 부대야. 그래서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회사라고 하는 거야. 회사니까 회사의 우두머리는 사장님, 그래서 사장님이라고 그냥 부르는 거야. 일단 그 사장님 따라가면, 자네 인생이 펴이는 걸세. 지금 나라 사정이 어려워서 밥 굶는 사람도 쌔고 쌨는데, 가면 밥도 주고 제대할 때면 목돈도 주니까 자네도 이만한 가게 차리는 건 일도 아닐 거야. 나만 믿게나.”
--- p.72
한국, 꿈에 그리던 나라였다. 베트남에서 살 때, 나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거기 나오는 한국 남자들은 다들 잘생기고 자상했다. 여자에 대한 배려가 철철 넘쳤다. 드라마 속 가족들은 다들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다. 나는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브로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소개받아 남편이 될 남자를 만났다. 나보다 스무 살 많은 건 문제가 안 되었다. 남들 하는 대로, 베트남에서 식을 올리고,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비행기를 타는 건 즐거웠다. 그리고 시댁이 될 시골로 와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시골 풍경은 내가 살던 베트남과 비슷했다. 그래서 더 친밀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는 사진을 보내드렸다.
--- p.92~93
김의 표정으로 미루어,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김은 그림자 취급을 받고 그냥 나왔을 것이다. 김의 표정이 그로 하여금 방에 가서 먹던 과자 봉지를 꺼내 오게 했다. 김은 과자를 집는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말없이 재떨이를 밀어주었다.
김은 그림자 취급에 조금 질린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말이야, 내가 들어가도 인사 한마디가 없었어, 하고 푸념을 했다. 그런 뒤엔 이 사람, 저 사람 끄집어내서 흉을 보았다. 길에서 인사하려 해도 외면하는 박, 밭에서 일하는데 인사 건넸더니 대꾸도 안 하는 정가 등등.
--- p.113~114
문밖에 발짝 소리가 난다. 포장이 안 된 도로라서 소리가 안 나는데. 어쩐 일인지 발짝 소리가 들렸다. 김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본다. 가녀린 여자, 월남 새댁이다. 갑자기,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그와 말을 섞는 이는 그처럼 혼자 사는 사람, 필성이뿐이다. 그는 문을 연다. 여자가 깜짝 놀라 걸음을 빨리한다. 외국에서 온 여자까지 나를 멸시하다니, 아니, 무서워하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약이 올랐다.
---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