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에 피는 매화와 이어서 피는 자두꽃 배꽃 사과꽃은 모두 하얀 꽃이다. 그런데 복숭아꽃은 불그레한 색이었다. 그 도화색을 띤 탐스러운 복숭아가 초록색 풀밭에 우수수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주워서 들여다보니 바늘구멍만 한 구멍이 군데군데 보인다. 벌레 구멍이다.
다른 건 몰라도 복숭아만큼은 약 안치고는 절대로 안 된다고, 약소하게는 쳐야 한다는 나와 못하게 말린 강 여사와의 갈등 결과다.
주먹만 한 복숭아를 깎아보니 맛난 과육 군데군데에 벌레가 들어있다. 옛말에 콩 세 알을 심으면 한 알은 새가 먹고 한 알은 벌레가 먹고 한 알은 사람이 먹는다고 했는데, 삼분의 일은 수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변이 터져 나왔다.
떨어진 열매를 몇 양동이나 주워 거름 자리로 날랐다. 제법 알이 굵어진 감도 날마다 떨어져 내린다. 농약을 안 쳐서다. 떨어져 뒹구는 감이 삭는 냄새가 시큼하다.
시골에 드나들면서 보면 논밭에 농약 치는 광경을 흔히 본다. 또 제초제를 뿌려 벌겋게 풀이 마른 밭이나 밭두렁도 많이 보인다. 제초제의 독성은 농약의 200배다.
인력이 없어서 제초제나 농약을 남용하기도 하겠지만 농약과 제초제 위험에 대한 의식 부족도 이유일 것이다. 우리 밭은 주변에서 떨어진 데다 지대가 높아 이웃 농지의 약이 날아오는 것이 차단돼 다행스럽긴 하다. 그런데 다 키워서 제대로 수확 못 하는 복숭아를 보니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농약으로 거의 목욕을 시킨다는 고추도 약 하나 안치고 잘 키웠는데 달고 향긋한 복숭아는 병충해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남들처럼 약 쳐서 농작물과 토양 오염시키면서 농사지을 바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러느니 자연에 있는 야생초 채취해 먹는 게 훨씬 유익하고 바람직하다는 게 강 여사의 강변이다. 그래도 성한 것과 흠 미미한 것 골라 담은 복숭아 무게에 차가 휘청했다. 귀갓길에 국도변 마을 앞에 있는 할머니들을 본 강 여사가 소리친다.
“앗, 저 할머니들께 복숭아 좀 드립시다.”
자동차를 뒤로 해서 복숭아 한 봉지 담아드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동네 꼬마들에게도 몇 알씩 집어 주는 등 강 여사는 복숭아가 많아 어쩔 줄을 모른다.
“책이 든 가방을 흔들의자에 두고 왔네.”
“저런, 내일 오후에 비 온다던데.”
내일 책 가지러 가기로 하면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연달아 밭에 가다니 웬 횡재!
다음 날 오전 복숭아 상자에 주소 써서 몇몇 지인들께 택배 붙이고, 흠 있는 복숭아 한 대야를 깎아서 설탕 끓여 통조림을 만들었다.
이른 점심 먹고 농장에 가 보니 과연 책가방은 흔들의자 위에 있었다. 언덕배기에 심어놓은 광나무가 보이지 않아 같이 풀을 베기로 했다. 풀 속에 갇힌 광나무들을 조심조심 찾으며 풀을 벴다. 그늘에서 놀기도 힘겨운 여름날에 아래위 긴 옷 입고 벌레 방지 장비와 장갑, 장화 차림으로 김을 매거나 풀베는 일은 가벼운 노동이 아니다. 몸 바깥의 열기보다 안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 한참 풀베기에 열중해 있는데 모자에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진다. 아랑곳하지 않고 풀베기에 열중하는데 점차 빗줄기가 거세졌다.
“여보, 비 많이 온다. 어떡할까?”
내 말에 강 여사가 대답했다.
“젖었는데 계속해야죠.”
빗줄기가 퍼붓듯이 쏟아지더니 금세 장화 안에 물이 가득 차고 속옷까지 빗물이 젖어 들었다. 키 큰 풀에 파묻힌 광나무를 벨 뻔한 적도 몇 번, 다행히 한 그루도 다치지 않고 주변의 풀을 다 베 주었다.
농장 구입 첫해에 포클레인으로 언덕 작업을 했는데 겨울 지나 해빙기에 다듬은 흙이 무너져 내렸다. 언덕 튼실해지도록 광나무를 심었는데 심은 이래로 돌보지를 않아 풀에 치여 버린 것이다. 빗속 풀베기를 다 하고 나니 빗발이 성글어졌다. 여기는 나의 취미 생활, 건강 밥상 지킴이, 질리지 않는 여행지, 생활의 활력소인 제3의 지대다.
--- 「아까워라 복숭아 낙과」 중에서
덥다. 정말이지 이렇게 더운 적은 없다. 날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푹푹 찌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지구를 이렇게 열 받게 한 게 인간이니 전 지구적 의논과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올해 리우 올림픽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산은 그렇게 더운 도시가 아니었는데 올해는 죽을 만큼 더웠다. 반면에 대구는 시의 노력으로 도시 온도를 3도 낮췄다고 한다.
해결책은 나무였다. 어지간한 크기의 플라타너스 세 그루가 에어컨 한 대라니, 지구의 온실효과 해결책은 바로 나무라는 것을 브라질올림픽 개막식 행사로도 보여줬다.
올해 7월에 외출했다가 크게 낙상한 강 여사는 얼굴 상처가 나을 때까지 햇빛을 피해야 해서 여름 내내 방콕이다. 혼자 농장에 와서 언제나처럼 작업복 갈아입기 전에 한 바퀴 휘이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일어났다.
도시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농사를 짓다가 은퇴 후 농부가 되는 것은 내 꿈이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하는데, 오염되지 않은 먹거리 생산은 물론이고 흙을 일구는 노동 속에서 성실함과 진실, 겸손 같은 덕목을 고양하는 원대한 목표까지 있었다.
그러나 농사 십 년 차가 넘으면서 새삼 그동안의 일을 점검해 보는 마음이 든다. 불경에는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삼가라’는 말이 있다. 좋아하는 일이 뜻깊고 바람직할지라도 사유하고 의심해보는 일이 마땅하다. 자연 속에서 살진 땀 흘리며 즐거이 일했지만 가정과 타인에게 얼마나 유익했으며 자신의 호연지기 함양은 얼마나 되었는지…….
그러나 생각은 여기까지, 너무 더워서 차가운 지하수를 끼얹으며 몸을 식혔다. 뭔가에 몰두하는 건 더위를 잊는 한 방법인데 땀을 줄줄 흘리며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강 여사가 뭐라 평가할지 걱정되나 이번만큼은 좀 자신감이 있다.
덥고 목 말랐지만 올해 같은 더위에 지하수를 파서 생각할수록 다행스럽다. 땀을 팥죽같이 흘리다가도 물만 끼얹으면 순식간에 식는데 너무 차서 햇볕에 두었다가 사용할 정도다. 해가 지고 나서 마늘 심을 밭을 일구고 저녁밥을 차려 먹었다.
콩나물 위에 차돌박이 얹고 고춧가루 솔솔 뿌리고, 다시 콩나물 위에 차돌박이 얹고 고춧가루 솔솔 뿌린 뒤 조선간장 한 숟가락 반, 커피잔에 물 반 잔 넣어 뚜껑 닫고 점화하면 되는 콩나물 찜이다.
김이 나면 대파 듬뿍 넣고 뒤적거릴 때 참기름도 넣어 뒤적인다.
먹을 때 위에 들깻가루를 뿌려 먹으니 밥반찬과 술안주로 그만이었다. 강 여사가 일러준 대로 만들었는데 훌륭했다. 차돌박이 대신 대패 삼겹살이나 오리고기를 넣어도 되고 코다리나 대구뽈로 해도 좋다고 한다. 차돌박이 콩나물 찜 만들어 과일 물김치, 복숭아 깍두기, 오징어채볶음과 조촐하게 차린 인증사진을 집에 있는 강 여사에게 보냈다.
자고 나니 자욱한 안개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더위에 쫄쫄 굶은 듯 밤에 다녀간 고양이는 사료와 고기를 말끔히 먹었다. 먹고 가면 반갑고, 왔다 간 기척 없으면 걱정되는 오래된 이상한 관계다.
--- 「비지땀 흘리며 만든 비닐하우스」 중에서